"임금 투명성 제고, 미국 기업 유치해야"
[더팩트ㅣ여의도=박재우 기자] "때론 절박함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모든 것이 한 줌의 재가 될 수도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정부에 요청했고, 최근엔 미국에도 다녀왔다. 국면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미국의 입장이 중요한 상황이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 회장은 최근 미국을 다녀온 뒤 "미국의 개성공단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졌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정 회장은 남북관계가 좋아지면서 '개성공단 재개'라는 희망이 현실화될 줄 알았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라는 외부 요인이 발목을 잡고 있다.
개성공단기업인들의 자산점검 목적의 방북 허가도 통일부가 아닌 '한미워킹그룹'(북한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한미 간 조율을 긴밀히 하기 위해 韓외교부·美외무부를 주축으로 구성)의 허락을 받아 9번째 만에 승인됐다. 그러나 이후 진척된 것은 없다. 이에 정 회장 등 개성공단기업협회 관계자들은 지난 10~16일 개성공단 재개 취지를 직접 미국에 설득하기 위해 워싱턴D.C.를 방문해 미 연방 의회 의원, 국무부 관계자, 싱크탱크 전문가, 재미교포를 만났다.
정 회장은 "개성공단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에게 실상과 가치를 설명했다"며 이번 방미로 충분한 성과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 기업이 개성공단에 유치됐더라면 쉽게 폐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2차 방미는 개성공단 재개가 되면 투자 유치를 목표로 갔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털어놨다. <더팩트>는 지난달 26일 정 회장을 만나 방미 성과와 개성공단 재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 2016년 1월 북한이 4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박근혜 정부는 한 달 뒤 개성공단을 전면 폐쇄했다. 통일부는 당시 개성공단 임금이 북한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연구에 전용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얼마 뒤 통일부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결정으로 피해를 본 쪽은 한국 기업인들과 북측 노동자들이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16일 발표한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경영 환경 및 향후 전망' 조사 결과 입주기업 108개사 중 '개성공단 중단 이전보다 경영 상황이 악화됐다'고 답한 기업은 76.9%에 달했다. '사실상 폐업 상태'라고 응답한 기업도 9.3%로 조사됐다.
정 회장과 개성공단기업인들에게 2016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일 수밖에 없다. '정부가 폐쇄하지만 않았다면'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좋아지자, 정 회장은 개성공단 재개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어떤 장애물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 회장은 "두말할 필요 없이 장애물은 미국이다. 개성공단을 처음에 조성할 때도 미국에 동의를 어렵게 구해 추진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어리석게도 자체적으로 폐쇄 결정을 했다"며 "그렇게 폐쇄하면서 미국의 양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됐다. 협약이나 협정에 의해서 구속된 것은 아니지만, 구조상 그렇게 돼 있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이유도 미국 결정권자들의 개성공단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장애물이면서 키(Key)를 쥐고 있는 미국에 다녀온 성과가 궁금했다. 문전박대는 당하지 않았겠지만, 개성공단 재가동이 왜 필요한지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는 "2016년 2월에 개성공단 폐쇄를 합법화하기 위해 통일부가 개성공단 임금이 대량살상무기(WMD)에 전용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발표였으니, 미국은 당연히 믿었다"며 "개성공단이 어느 규모이고 총액이 얼마인지, 또 규모나 위치는 잘 모른다. 미국에 각인된 것은 개성공단이 북한의 상당한 달러 수입원이고, 이를 통해 무기개발에 쓰였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게 전부"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실 개성공단 임금은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규모가 아니었다. 예컨대 2015년 개성공단 임금으로 연간 8000만 달러가 들었다. 근로자가 5만5000명 정도였는데, 4인 가족 기준으로 22만 명이라고 치면, 한 사람당 월 30달러 정도밖에 안 된다. 이들은 쌀, 식용유 등 생필품을 구매해야 하는데 과연 임금에서 전용할 금액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당시 정부의 발표내용을 부정했다.
정 회장 일행은 개성공단 문제를 미국 연방의회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언론보도에서는 미 의원들이 많이 오지도 않았으며, 몇몇은 늦게 도착했다고 했다. 개성공단에 대한 미국의 관심 정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 회장도 미국의 관심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는 "개성공단 자체에 대한 미국 의회의 관심이 크지 않다. 개성공단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크지 않다"라며 "그 행사를 주관한 의원도 그날 중요한 투표가 있어 늦게 왔다. 의원은 3명이었지만, 많은 보좌진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국회 행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보통 우리 국회에서는 의원들이 축사를 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우리 행사에 참여했던 미국 의원들은 끝까지 경청하고 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방미에서 미 연방 의회, 국무부, 싱크탱크는 물론 교포들과도 시간을 가졌다.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름 의미 있는 의견도 들었다.
그는 "의회, 국무부 같은 경우는 국가의 대표 조직이다 보니 발언에 한계가 있었다. 먼저 비핵화를 우선해야 한다는 얘기를 전제하고 그런 다음에 궁금한 사항을 묻고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면서 "미국 관계자들이 생각보다 개성공단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개성공단에 대해 모르는 이들에게 실상과 가치를 설명할 수 있어 오히려 우리가 성과를 충분히 얻었다"고 자평했다.
이어 "싱크탱크에서는 비핵화 문제가 나오지 않았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출신의 조셉 윤 미국평화연구소(USIP) 선임고문은 '개성공단 임금문제의 투명성만 확보된다면 비핵화와 별개로 개성공단 재개가 가능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어떻게 하면 임금지급 투명성이 확보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통일부가 개성공단 재개 문제에서 너무 한미워킹그룹의 눈치만 본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 회장은 통일부의 태도를 이해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오히려 통일부가 한계를 느낄 것이다. 그 이상의 차원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정리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한미워킹그룹은 우리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가 주축이다. 남북문제는 통일부에서 다루고 있는데, 미국에 동의를 구하거나 협의를 하는 단계로 가면 외교부로 넘어간다. 상대적으로 통일부의 의견은 반영이 안 되는 것이다. 통일부의 주체적인 행동 결여가 아니라 우리 정부 내 의사결정 구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가 보니 외교부에서 무엇을 했는지 미국 관계자들이 개성공단 재개를 위해 제대로 알아야 할 부분을 잘 모르고 있더라"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도 최근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후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상황이 친서외교로 다시 불씨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기업 관계자들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다.
정 회장은 기대보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개성공단 재개를 위해서는 북미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보다 주도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미관계가 원만한 합의에 이르러서 그 결과에 대한 산물로 개성공단 재개를 기대하는 태도는 우리 정부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모습"이라며 "개성공단 재개 부분에 대북제재와 관련한 부분이 있지만, 임금지급 투명성 부분에 대해 북측과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볼 수 없었던 건 아닌지 우리 정부가 되돌아봐야 한다"고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를 주문했다.
특수한 남북관계 속 정부를 믿고 개성공단에 투자했던 기업인들에게 북한은 아픈 손가락이다. 잘라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당장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좋아져 개성공단이 재개된다 해도 또 다시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름의 방법도 생각했다. 두 번째 미국 방문은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튼튼한 동아줄을 잡기 위한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법적인 측면에서도 재발 방지를 위한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가장 궁극적으로는 공단의 규모가 커지는 게 중요하다. 공단의 규모가 커져 서로 입을 피해가 커지게 되면 쉽게 폐쇄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이어 "2차 방미는 공단 재개가 된다는 전제로 공단 안정성 재고를 위해서 미국, 외국 기업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가고 싶다. 미국 기업이 몇 개 있었으면, 박근혜 정부에서 하루아침에 닫을 수 있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한편 인터뷰 이후인 지난달 30일 판문점 북미상봉 직전 '개성공단'에 대한 희망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개성공단기업인들의 우려를 아는 듯 문재인 대통령이 판문점 인근 비무장지대(DMZ) 오울렛 초소(OP)를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시찰하면서 개성공단에 대해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개성공단은 한국 자본과 기술이 들어간 곳"이라며 "남북 경제에 도움이 되고 화해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된다. (북한이) 전방 부대를 개성공단 북쪽으로 이전했다. 한국 안보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