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7300명의 '새로운 노무현'…"못다 이룬 꿈 이루겠다"
[더팩트|김해=문혜현 기자]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입니다."
23일 오전 김해시 진영읍의 조용한 봉하마을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추모의 노란 물결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3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날씨 속에서도 수많은 방문객들이 노란 계열의 옷을 입거나 손수건을 두른 채 밝은 표정으로 추도식장으로 향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인 이 날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또 임기를 함께 했던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어서 큰 관심을 모았다. 추도식은 주최 측인 노무현재단이 '새로운 노무현'이라는 주제로 노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바탕으로 사람사는 세상의 꿈을 이어가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노 전 대통령 묘역엔 일찍부터 헌화나 분향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분향소 양 옆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었다. '새로운 노무현들의 조직된 힘으로 사람사는 세상의 꿈 키우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분향소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너럭바위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 추도식엔 각계각층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재단 측에 따르면 김정숙 여사, 이낙연 국무총리, 문희상 국회의장, 부시 미 전 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1만 73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치권에선 각 당 대표와 원내대표, 의원 다수가 참석했지만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불참했다. 대신 한국당에선 조경태 최고위원과 장제원·신보라 의원, 노무현 정부 마지막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박명재 의원이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행사 시작 전 한국당 대표단은 경찰 측의 엄호를 받으며 입장했다. 혹시 모를 충돌 우려 때문이었다. 조용히 입장하는 조 최고위원을 알아본 일부 추모객들은 "여기가 어디라고 오냐!", "조경태다 조경태!"라는 등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 조지 W 부시 美 전 대통령…"노무현은 강력한 지도자"
본격적인 추도식은 유정아 전 노무현시민학교장의 사회 아래 진행됐다. 부시 미 전 대통령은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추도사를 이어갔다.
그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여러분과 함께 추모할 수 있게 돼서 큰 영광"이라며 "저는 청와대에서 이곳으로 왔고, (노 전 대통령의) 바로 전 비서실장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전 비서실장이 바로 여러분의 현 대통령이다"라고 밝혔다.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권양숙 여사에게 직접 그린 초상화를 선물했다. 그는 그림을 언급하면서 "저는 노 대통령을 그릴 때 인권에 헌신한 그를 생각했다. 친절하고 따뜻한 모습을 회상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신 분을 그렸다"며 "오늘 저는 한국의 인권에 대한 그분의 비전이 국경을 넘어 북에게까지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강조했다.
또한 "미국은 모든 한국인이 평화롭게 거주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모두를 위한 기본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통일한국의 꿈을 지지한다"며 한반도 평화 무드를 환영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저는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 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그렸다"며 "그 목소리를 내는 대상은 미국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며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여느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노 전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목소리를 냈다"며 "그분의 훌륭한 성과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가치, 가족, 국가, 그리고 공동체였다. 노 전 대통령이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이 소중한 마을, 그리고 노무현재단의 노력으로 여러분의 소중한 추모의 마음이 이 추도식에서 전달되고 있다"고 말했다.
◆ 첫 번째 비서실장 문희상 "보고싶습니다"
부시 미 전 대통령에 이어 추도사에 나선 문희상 국회의장은 "대통령님이 계시지 않는 봉하의 봄은 서글픈 봄이다. 사무치는 그리움의 5월"이라며 심정을 드러냈다. 문 의장은 2002년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의 첫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문 의장은 "국민은 대통령님을 사랑했다. 국민장으로 치러지던 이별의 시간, 이레 동안 수백 만의 국민은 뜨거운 눈물과 오열 속에 저마다 '내 마음속 대통령'을 떠나보내야 했다"며 "반칙과 특권에 맞서 싸웠던 나의 대리인을 잃은 절망이었을 것이다. 당신에 대한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은 회한이었을 것이다. 지켜드리지못했다는 자책이었을 것이다"라고 목소리 높였다.
이어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님의 당선은 그 자체로 지역주의 해소의 상징이었다"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이제 노무현의 그 꿈을 향해 다시 전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노무현의 그 꿈을 향해 다시 전진하겠다. 분명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두 번 잃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노무현'을 찾으려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강물처럼 가려고 한다"고 밝혔다.
◆ 이낙연 "그래도 저희는 그 길 가겠다"
이낙연 총리는 "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스스로를 '봉화산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연결된 산맥 없이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이라고 말씀하셨다"며 "그러나 보시라. 대통령님은 결코 외로운 산이 아니다. 대통령님 뒤에는 산맥이 이어졌다. 봉화산은 하나가 아니다. 국내외에 수많은 봉화산이 솟았다"고 노 전 대통령을 추모했다.
이 총리는 "대통령님의 생애는 도전으로 점철됐다. 특히 지역주의를 비롯한 강고한 기성질서에 우직하고 장렬하게 도전해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실 정도였다"며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대통령님은 저희에게 많은 것을 남기셨다. 희망과 고통을, 그리고 소중한 각성을 남겼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대통령님은 존재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이었다"며 "'사람사는 세상'을 구현하려는 대통령님의 정책은 약한 사람들의 숙원을 반영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대통령을 마치 연인이나 친구처럼 사랑했다"고 회상했다.
이 총리는 "대통령님 퇴임 이후의 전개는 그 각성을 더 깊게 했다. 늘 경계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정의도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게 됐다"며 "사람들은 대통령님 말씀대로 '깨어있는 시민'이어야 한다는 것을 각성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의 각성은 촛불혁명의 동력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대통령님이 못다 이루신 꿈을 이루려 노력하고 있다"며 "대통령께서 꿈꾸시던 세상을 이루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저희들은 그 길을 가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수많은 추모객들은 환호했고 큰 박수를 보냈다.
어린아이를 안은 사람들, 휠체어를 탄 사람들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을 기억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추모 공연으로 울려퍼진 '떠나가는 배'와 '92년 장마 종로에서', '상록수'를 함께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이날 추도식은 주요 내빈들과 추모객들의 헌화로 막을 내렸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입니다."
추도식 중 상영된 영상 속 노 전 대통령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moone@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