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이정미, 단식 투쟁…선례로 알아보는 단식의 정치학
[더팩트ㅣ국회=임현경 기자] "아직 살아있다. 쓰러지기 전에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지난 6일부터 국회 로텐더홀에서 단식농성 중인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는 13일 원내 정책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쓰러지기 전인 15일 여야 5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관련해 합의했다.
손 대표는 물과 죽염만을 섭취하며 버텼지만, 안대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의자에 누워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길어졌다. 원래 74~75kg이었던 몸무게는 69kg으로 줄어들었다.
단식은 '일정 기간 음식과 음료의 섭취를 자발적으로 끊는 행위'로, 국내 정치인들의 경우 최소한의 수분과 염분은 섭취하면서 배를 불릴만한 음식을 먹지 않는 방법으로 단식 투쟁을 벌여왔다. 이들이 써내려간 '단식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 박수를 받은 사건'과 '목적 관철에 실패하고 조롱받은 사건'로 나뉜다.
◆ 평화적 투쟁으로 값진 성과…김영삼·김대중·이재명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 단식의 대표적인 예로는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가택연금 중 전두환 정권에 맞서 벌였던 투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 신민당 총재였던 당시 언론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며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을 시작했다. 안기부 직원들이 그의 단식을 멈추게 하기 위해 고기를 구워 냄새를 피웠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있다.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연금 해제와 정치활동 묵인 등의 성과를 거두며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해당 기록은 2007년 현애자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27일 동안 단식하기 전까지 국내 정치사상 '최장 단식'으로 남아있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0년 10월 내각제 반대와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를 위해 13일간 곡기를 끊었다.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그는 3당 합당으로 218석을 보유하게 된 민주자유당이 지방자치제를 미루고 내각제 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자 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김대중(DJ) 전 대통령를 방문해 그의 요구사항을 수용했던 민주자유당 대표가 바로 김영삼(YS)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은 같은해 12월 지방자치법 개정안 통과, 이듬해인 1991년 지방자치 선거가 실시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됐다. 이는 1961년 군사정권에 의해 중단된 이후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선거였다.
지난 11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혐의로 기소되며 위기를 맞은 이재명 경기지사도 성공적으로 단식투쟁을 마친 경우에 해당한다. 이 지사는 성남시장이었던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 개혁안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10일간 이어졌던 이 지사의 단식은 당시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 대표가 "20대 국회에서 지방 업무에 대한 예산을 합리적으로,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고 설득한 끝에 중단됐다. 이 지사는 해당 사건을 통해 '지자체를 위해 중앙정부와 싸우는' 투쟁가로서의 인상을 깊게 남겼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는 문재인 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뒤쫓는 '대권잠룡' 3순위로 꼽히기도 했다.
◆ 웃음거리로 소모된 굶주림…최병렬·이정현·김성태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곰탕 단식' 논란으로 억울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 전 대표는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특검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단식을 시작해 10일 뒤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재의결했을 때 종료했다.
최 전 대표는 단식 중 하얀 국물을 마시는 모습이 포착되며 '곰탕 단식', '황제 단식'이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곰탕이 아닌 쌀뜨물로 밝혀졌다. '단식 선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시 최 전 대표에게 전한 "굶으면 죽는데이"라는 조언은 이후 후배 정치인들에게 두루 인용됐다.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집권여당 대표로는 최초로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는 2016년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되자 "정 의장이 물러나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라며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 전 대표는 7일 만에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후 단식을 중단했다.
당시 이 전 대표는 당원들과 상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단식을 결정한 데다, 이미 박근혜 정부가 장관 해임안에 대한 국회 의결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명분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앞서 단식했던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빠르게 병원 신세를 지며 조롱받기도 했다.
김성태 전 한국당 원내대표도 지난 5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했다. 그는 투쟁 3일째에 스스로 한국당 지지자라고 밝힌 30대 남성에게 턱을 맞는 사고를 당해 '혼수성태'라는 굴욕적인 별칭을 얻었다. 김 전 원내대표는 지난 11일 원내대표 퇴임식에서 이에 대해 "얼마 전 위턱과 아래턱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치과에 갔는데, 그때 턱을 가격당한 것 때문에 무리가 왔다고 하더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투쟁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목적을 이루며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다. 민주당이 특검법안에 합의하며 9일 만에 단식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이후 허익범 특검이 수사 성과를 내지 못하고 故 노회찬 의원 사망 사건이 벌어지는 등 끝내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편 손 대표와 이 대표의 단식투쟁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홍 원내대표가 이날 설득에 실패한 데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연내 합의 성사가 요원하기 때문이다. 손 대표와 이 대표의 단식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박수와 조롱 중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지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