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신진환 기자]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지난 2015년 1월 23일. 11·12대 대통령 전두환(현 87세) 씨는 부인 이순자 씨와 서울 연희동 사저 근처인 안산도시자연공원에서 산책을 즐겼다. 한창 추웠던 시기임에도 겨울바람을 쐬러 나온 전 씨는 아내와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전 씨는 거동에 불편이 없어 보였고,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면서 '고령임에도 참 건강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전 씨가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병을 지난 2013년 진단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전 씨 측은 지난 27일 병명을 밝히면서 "정신 건강이 안 좋아 정상적인 법정 진술이 가능할지 의심스럽고, 그 진술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이를 이유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1심 재판에 불출석했다. 그가 1980년 5월 18일 군대를 동원해 강제 진압한 도시 광주가 관할이다. 전 씨는 앞서도 준비 기간을 달라며 지난 5월과 7월 재판을 미룬 바 있다.
3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전 씨의 건강이 악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간 전 씨의 행적을 보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근거 중 하나가 지난해 출간된 전 씨의 회고록(혼돈의 시대)이다. 그는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 한국 근현대사에 얽힌 자신의 인생사를 회고록에 담았다. 전 씨 측에 따르면 방금 전의 일들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인데, 여론은 그렇다면 어떻게 회고록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논란이 일자 전 씨의 측근인 민정기 씨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2000년부터 구술 녹취를 했고, (전 씨가) 2013년인가 2014년 무렵 저를 찾아 '이제부터는 민 비서관이 완성하라'고 하셨다"면서 "회고록은 내가 썼다"고 주장했다. 회고록의 주인은 전 씨인데 측근의 작품이라니 황당한 대답이 아닐 수 없다. 광주지법 역시 회고록의 출간과 질환을 앓고 있는 시기의 모순에 의심을 품고, 전 씨의 건강 문제의 의문을 제기하는 상황이다.
그 이전에도 전 씨는 대내외 활동을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해왔던 터라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전 씨는 지난해 치러진 대선과 2016년 4·13 총선 때도 투표소를 찾아 투표를 마쳤다. 취재진의 기념촬영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는 등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다는 후문이다. 특히 지난해 1월에는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신년회를 열고 "새로운 대통령은 경제를 잘 아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2015년 10월에는 자신의 모교인 대구공고를 찾아 참석자들과 한대 어울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러한 행적을 종합해보면 전 씨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전 씨 측에서는 전 씨가 고령인 탓에 하루아침에라도 건강이 악화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업자득인 것 같다. 전 씨는 지난 2003년 추징금 관련 재판에서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뻔히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전 씨의 말에 국민은 경악했다. 지금도 희대의 망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치료비는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지난 5월 18일,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취재하던 중 한 유가족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유가족 양매자(70) 씨의 남편은 민주항쟁에 나섰다가 군인에게 머리를 구타당한 뒤 10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잇다 숨졌다고 했다.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딸은 "어머니는 평소 지금이라도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에겐 억겁 같은 세월이 흘렀지만, 마음의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모든 희생자의 가족들이 이와 같지 않을까.
5·18 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씨는 군대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강제 진압하고 유혈 사태를 벌였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전 씨에게 있으며, 처절한 반성과 함께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광주가 멀어서 법원에 못 가겠다"는 전 씨 측의 주장은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 씨는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상태일 때 재판에 성실히 임하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전 씨가 사죄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법정에 서는 것은 사죄와 별개의 문제다. 부디 자신을 향한 부정적 여론에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며 분노를 터트리지 않길 바란다. 감정이 격해지거나 흥분하면 병세가 악화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