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아픔 딛고, 현재 갈등 넘어…서대문독립민주축제 현장
[더팩트ㅣ서대문형무소역사관=임현경 인턴기자] "탄압, 독재, 빼앗긴 주권… 일제 강점기의 아픔이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해요."
8월 15일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서대문독립민주축제가 열렸다. 이날 축제에는 유치원·초·중·고등학생, 연인, 가족, 외국인 관광객 등 남녀노소 다양한 시민들이 찾아왔다.
육군, 해병대 등 병사들이 군복을 입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휴가를 나온 것이냐' 묻자 한 육군 병사가 "교육 차원에서 단체로 관람하는 것"이라 했다. 몇몇 병사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멋진 자세를 지어 보이자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아이들이 '나라를 지키는 멋진 군인 아저씨'라며 눈을 빛냈다. 이에 군인들이 마치 유명인사처럼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해주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멀리서 지켜보던 다른 부대원은 "누가 보면 여기 홍보대사인 줄 알겠다"며 즐거워했다.
전시관과 옥사에서는 평소와 같이 전시, 고문 기구 체험 등 일제의 잔인한 실상과 이에 대항했던 독립투사의 굳은 의지를 기렸다. 관람객은 직접 좁은 독방이나 날카로운 가시가 둘린 고문 상자에 들어가 보며 당시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어린이가 무섭다며 도망치는 어머니를 붙잡으며 "나도 용기 내서 들어갔는데, 엄마도 얼른 해봐. 그러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고 권유했다.
독립투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공간도 있었다. 당시 사형장이 그대로 재현된 좁고 어두운 곳이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대한 영상이 상영됐다. 밖에서 자유롭고 역동적으로 전시관을 관람하던 시민들은 이곳에서만큼은 잠시 웃음기를 거두고 영령을 기리기 위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 일제 물러갔지만 닿지 않는 외침 "국민의 목소리 들어달라"
건물 내에서 과거의 시간을 돌아보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면 건물 밖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만날 차례였다. 건물 주변에 마련된 부스에서는 거주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독립운동가 후손을 위한 후원금 마련, '한국 민주주의의 시련·도전·성취·과제'를 다룬 전시 등 다양한 행사가 개별적으로 진행됐다.
한 부스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이서연(16) 양은 "아이들이 이 이 자리에서 배운 것을 또 다른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만 하기에는 아까운, 정말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송지현(16) 군 역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들을 보고 자란다면 나중에 가치관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 희생자 8인의 넋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해당 부스에는 판화 제작 체험,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도보다리' 만남을 재현한 포토존이 마련됐다. 이창훈 4.9 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은 이에 대해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선생님들이 바라던 바가 민주화이자 평화 통일이었기 때문에 두 행사 모두 아주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이 실장은 "인혁당 사건 같은 경우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국정원의 소송에 따라 '국가에서 배상금을 너무 많이 지급했으니 환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그 이자를 갚지 못해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시다"며 "간첩 조작 사건들이 많지만 아직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본질적이지 않은 이유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박근혜 정권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리는 바람에, 아직도 자기 한을 풀지 못하고 답답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며 "문제가 하루빨리 해결돼야 하는데 국회에서 관련 법안 심사를 못 받고 있다. 한국당 분들이 반대하고 있어서다"고 토로했다. 이 실장은 "뭐니 뭐니 해도 과거에 잘못한 부분들을 반복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국민을 탄압하고 못되게 굴었던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반복하지 말고, 73년 전 해방됐던 심정으로 돌아가 평화를 위해 서로 애썼으면 좋겠어요. 사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리사욕을 위해, 다음 선거를 위해 그러는 것이겠죠. 다만, 친일과 반공을 통해 형성된 기득권층과 그를 향한 지지율이 더 높아지지 않기를 바라요."
이 실장은 이같이 말하며 판화를 찍어내는 아이들을 살폈다. 잉크를 묻힌 목판에 종이를 대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꾹꾹 누르니, 인혁당 사건 희생자 8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여덟 송이의 꽃이 수놓아진 판화가 완성됐다.
여성 독립 운동가의 존재와 그들의 업적을 알리는 '나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후예다' 부스도 시선을 끌었다. "여기 있는 그림, 달력, 엽서 모두 서로의 재능기부로 이뤄진 것들이에요. 전부 공익만을 생각한 비영리적인 활동이죠. 최근 국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논란과 참 대비되지 않습니까." 행사를 주최한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의 말이다.
심 소장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일이 우리 사회 정치인에 요구되는 자세와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쟁이나 정권의 당리당략이 아닌 3.1운동 당시 일어났던 우리 민족에 집중해주셨으면 좋겠다"며 "지난 9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100년 남북한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는데, 건너편 양쪽에서는 '건국절' 관련 세미나를 하고 있어 상황이 참담했다"고 전했다.
이어 최근 미투 운동에 대해서 "여성들이 이제까지 왜 모습을 숨겨왔는지, 여성들이 분출해서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하고 싶다. 이 또한 민심의 소리다"며 "여성들 또한 현상적인 부분에 매몰되지 말고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심 소장은 끝으로 "국회에 쳐진 울타리는 그들이 쳐놓은 것이지 국민이 쳐놓은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쳐놓은 테두리에 갇혀서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그 자리를 활짝 열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날 축제의 이름이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민주'인 이유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뻐하면서도 '민주주의적 가치'를 잃지 말자는 다짐이 담겼기 때문이다.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탄압과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서대문형무소가 과거의 상흔을 딛고 새로운 가치를 말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일제는 물러났지만, 이 땅에는 여전히 부딪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남아있다.
imaro@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