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 입장해 포토라인 비켜가…취재진 질문엔 묵묵부답
[더팩트ㅣ서울중앙지방검찰청=임현경 인턴기자] "말도 안 되는 차에서 내렸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한 취재진이 혀를 내두르며 이같이 말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 재판거래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김 전 실장은 14일 검찰에 출석하며 연막작전을 펼쳤다.
김 전 실장은 이날 검찰 소환 시각인 오전 9시 30분에 딱 맞춰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지검에 나타났다. 이날 오전 9시 28분까지도 검찰 청사 주변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현장에서 대기하던 취재진 사이에서는 김 전 실장이 검찰 소환에 또 불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그때 차 한 대가 청사 앞에 섰다. 취재 차량이었다. 잔뜩 긴장한 검찰 관계자 및 취재진은 차량에서 내린 사람이 기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차량 두 대가 줄지어 도착했다. 회색 승합차를 앞세운 검은색 대형 승합차는 청사 입구 계단 정 중앙에 정차했다. 검은색 승합차의 문이 열렸고, 지켜보는 모두가 김 전 실장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그러나 차에서 내린 이는 여러 서류를 손에 든 검찰 관계자였다.
여기저기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오던 찰나, 검은 양복 차림의 김 전 실장이 기습적으로 회색 승합차에서 내렸다. 김 전 실장 하면 떠오르는 커다란 안경도 쓰지 않았다. 앞서 지난 9일 건강상의 이유로 검찰 출석에 불응했던 김 전 실장이었기에 휠체어를 타고 등장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김 전 실장은 중앙에 마련된 포토라인에 서지 않고 곧장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내 동선이 익숙지 않았던 김 전 실장이 갑자기 방향을 틀자 다급히 그를 뒤쫓던 취재진과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다.
김 전 실장은 '청와대와 일제 강제징용 민사소송에 관해 교감한 사실이 있는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나', '검찰에 다시 선 심경이 어떤가' 등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굳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김 전 실장이 특수 1부 조사실로 들어가자 취재진은 일제히 고개를 저으며 혀를 내둘렀다. "머리가 정말 좋네", "첩보영화인 줄 알았어" 등 곳곳에서 그의 치밀함에 감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 전 실장의 연막작전이 검찰 측의 제안인지 김 전 실장이 직접 생각해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허를 찔린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편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지난 6일 석방된 김 전 실장은 이날 석방 8일 만에 다시 검찰에 소환됐다. 그는 양승태 대법원과의 '재판 거래'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2일 외교부를 압수수색하면서 김 전 실장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개입한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