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노랑장미' 문재인 '안개꽃' 김경수 '분홍 장미', 꽃길 배경은?
[더팩트ㅣ임현경 인턴기자] 바로 옆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은 한 지지자가 던진 분홍 장미꽃이 발치에 떨어졌을 때였다.
김 지사가 차에서 내려 걸음을 뗄 때마다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대형 확성기에서 각종 비방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미 3일 전에 경험한 상황이었다. 김 지사의 눈길은 잠시 꽃을 훑고선 다시 검찰과 취재진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김 지사는 지난 9일 오전 9시 30분께 댓글조작 의혹에 관해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드루킹' 특검 사무실에 출석했다. 지난 6일에 이은 2차 조사였다. 김 지사의 지지자들은 1차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걸음 앞에 장미를 던지며 응원했다. 현장에 있던 한 지지자는 "꽃길만 걷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소환 현장에 꽃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김 지사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 그 전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하며 꽃길을 걸었다. 지지자들이 이처럼 꽃길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 문재인 소환 땐 '안개꽃 행렬'…검찰 소환 꽃길 원조는 '노란 장미길'
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검찰에 출석하며 안개꽃을 선물 받은 바 있다. 그가 민주당 의원이었던 2013년 11월 6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폐기 의혹'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당시 지지자들은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검찰청에서 안개꽃을 들고 문 의원이 출석하기를 기다렸다. 문 의원은 내내 무거운 표정을 짓다가도 지지자들이 내미는 꽃다발에 둘러싸여 잠시 미소지었다.
지지자들이 상징성 있는 꽃을 들게 된 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주민들은 이날 오전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부터 각종 피켓과 노란 장비를 들고 그를 배웅했다. 노란 장미 행렬은 노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은 서울에서도 계속됐다. 지지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조사를 받는 내내 서초 대검찰청 앞을 지켰다. 이날 시작된 지지자들의 '꽃길'이 김 지사까지 이어져 왔다.
공교롭게도 김 지사는 문 대통령과 고 노 전 대통령이 소환당했던 때에도 현장에 있었다. 2009년에는 비서관 자격으로 노 전 대통령을 수행했고, 2013년엔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했다. 그런 그가 '드루킹' 사건으로 인해 피의자 신분으로 다시 검찰 앞에 서면서 '장미 꽃길'로 주목을 받았다.
◆ 사연도 의미도 각각…공통점은 '흔들리지 말자'는 지지자들의 다짐
고 노 전 대통령의 노란 장미는 '질투',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는 언제나 고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검찰이 그를 소환한 이유가 정치 보복이라는 비판을 담고 있다. 다만 지지자들이 노란 장미의 꽃말에 맞춰 선택한 것인지, 장미 중 노란색이라 고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노란색 자체가 고 노 전 대통령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노란색은 통상적으로 민주화를 상징한다. 1986년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에 큰 감명을 받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듬해 대선 상징색으로 노란색을 사용했다. 이후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가 활발히 사용해오면서 '노란색 하면 노무현'을 떠올리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그의 묘소가 위치한 봉하마을은 리본, 바람개비 등 노란색 상징물로 가득하다.
안개꽃의 꽃말은 '슬픔', '사랑의 성공', '약속', '간절한 마음' 등이다. 문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 안개꽃에 얽힌 추억이 있다. 그가 군 생활을 할 당시 연인이었던 김정숙 여사는 '문 이병'과의 첫 면회를 위해 안개꽃을 한 아름 들고 갔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을 통해 보통 맛있는 음식을 싸 들고 가는 경우가 많아 인상에 깊었다고 회상했다.
양정철 전 청와대홍보기획비서관이 문 대통령을 안개꽃에 비유하기도 했다. 양 전 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뜨거운 불덩어리 같다면 문 대통령은 안에 뜨거운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굉장히 냉정하다. 꽃으로 비유하면 노 대통령은 강렬한 장미꽃이다. 화려하고 향기도 강하면서 가시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당신 생각이 확고하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은 안개꽃 같은 분이다. 더불어서 같이 다른 꽃이 빛나게 하지만 사실은 그 꽃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꽃 말이다"고 했다.
김 지사의 지지자들이 선택한 장미는 경상남도의 도화이기도 하다. 경상남도는 '정열적인 색깔과 고상하고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장미는 강인한 도민 정신에 정열을 더하여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는 경남의 발전과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1973년부터 장미를 도화로 지정했다.
장미는 보통 '열정'을 의미하지만 그 색에 따라 꽃말도 조금씩 다르다. 김 지사의 발치에 놓인 분홍 장미의 꽃말은 '사랑의 맹세' 또는 '행복한 사랑'이다.
김 지사는 장미의 '가시'가 뜻하는 바에 주목했다. 그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장미꽃과 가시... 이제는 그 어떤 길을 가더라도 설사 그 길이 꽃길이어도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걸어가라는 뜻인 것 같다"며 지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어 "꽃에 담아주신 마음들, 가슴에 꼭 새겨두겠다"며 끝까지 꿋꿋하고 당당하게 걸어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