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과 사람들] '영원한 동지' 심상정, 닮은 꼴 인생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노회찬 원내대표, 심상정 의원(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이 지난 5월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 참석해 자리에 놓인 모니터에 최저임금 삭감반대 피켓을 붙이는 모습. /이새롬 기자

'진보의 큰 별이 떨어졌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1956년 8월 31일~2018년 7월 23일)이 향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드루킹 의혹'에 스러졌지만, 노 의원은 노동운동가이자 '진보의 아이콘'으로 한국 진보정치 지형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의 마지막 길을 동료 정치인들과 지인 등 많은 사람들이 세대와 진영을 넘어 '기억'하고 있다. <더팩트>는 노 의원과 인연이 있었던 일부 정치인들과의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편집자 주>

노동운동가, 정계 진출 '판박이'

[더팩트ㅣ신진환 기자] "나의 영원한 동지. 노회찬."

심상정(59) 정의당 의원은 24일 페이스북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같은 당 고 노회찬 원내대표를 이같이 표현했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은 영원한 정치적 동반자와 다름없다.

그만큼 인연이 깊다는 얘기다. 노 의원이 2015년 8월 SBS와 인터뷰에서 "두 사람(노·심 의원)이 부부인 줄 아시는 분들도 있다"고 밝힌 대목은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여실히 보여준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동지' 노 의원과 심 의원은 살아온 길도 닮았다. 마치 평행이론을 연상케 할 정도다.

◆ 노동운동·수배 생활 '공통점'

노 의원, 하면 '노동 운동'이 떠오른다.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반독재 투쟁이 참여했다. 일찌감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셈이다. 1979년 고려대에 진학해서도 학생 운동을 벌이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힘을 쏟았다. 그해로부터 3년 뒤 전기용접기능사 자격증을 딴 그는 건설 현장에 뛰어들어 용접공으로 활동한다. 노동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한 노 의원은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출범을 주도해 수배자 신분이 된다. 당시에는 노조를 만든 행위를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사법당국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1989년 검거된 그는 2년 6개월간 복역했다.

심 의원 역시 노 의원처럼 노동 운동에 투신했던 이력이 있다. 1980년 서울대 재학 당시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한 뒤 노동조합을 결성, 1985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맹파업인 정치적 연대파업투쟁인 구로동맹파업에 나섰다. 국보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는 것도 노 의원과 같다. 노 의원이 용접공 자격증이 있다면 심 의원은 재봉사 자격증이 있다. 심 의원은 지난해 6월 KBS의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회상했다.

"구로공단 여성 직장인들을 위해 야학을 가르쳤는데 회사가 궁금해 방학 때 거기서 일해봤다. 미싱사(재봉사) 자격증도 땄었다. 시다(보조) 하는 친구들이 대다수였고 근무 강도가 세다 보니 손을 많이 다쳤다. 산재 사고가 비일비재 하는 것을 보고 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23일 오전 서울 중구 자신의 자택에서 투신해 숨진 가운데 비보를 접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비통한 표정으로 의원실을 나서는 모습. /이새롬 기자

◆ 진보정당의 대표적 남녀 의원, 3선 타이틀 보유

노 의원과 심 의원은 진보정치를 이끌어온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노동운동가에서 중앙정치에 들어오는 과정도 비슷하다. 노 의원은 노동계에서 활동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20년 넘게 노동운동 현장을 지킨 심 의원도 같은 해 민노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발을 들였다.

17대 대선 패배의 책임을 놓고 민노당은 극심한 내홍에 휩싸였다. 2008년 당시 심 의원이 당 내분을 수습하고 당을 혁신하기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지만, 그해 당 대회에서 비대위의 혁신안이 부결됐다. 결국, 심 의원은 노 의원 등과 함께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노동운동가의 성향은 정치인이 돼서도 변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한편 화살을 대기업에 겨누었다. 대기업의 갑질 행태와 하도급과의 불공정 거래, 비정규직 문제 등의 악습을 뿌리 뽑기 위해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이유로 노 의원과 심 의원은 노동자와 서민층의 지지가 두터웠다. 대표적인 예로 노 의원은 20대 총선에서 노원병을 포기하고 공단이 밀집한 경남 창원 성산에 출마해 당선됐다.

두 의원은 진보정당 최초의 3선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 운동권 출신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진보정당에 계속 머물렀던 것 또한 똑같다.

24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의 빈소에서 심상정 의원이 고인의 부인인 김지선씨(왼쪽)를 위로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노 의원은 크게 언성을 높이지 않으면서 논리적이고 비유 화법을 잘 구사했다. 일례로 적폐청산이 정치보복이라는 야당의 반발에 "청소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됩니까?"(지난 1월 2일 JTBC '소셜라이브'에서)라는 식이다. 심 의원은 직설화법으로 유명해 화법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언변은 비슷하다는 평이다. 각자 특유의 '사이다' 발언으로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인기를 끈 것도 닮은 부분 중 하나다.

노 의원과 심 의원은 혈연 못지않은 친분이 있기도 하다. 노 의원은 심 전 대표의 남편이자 대학 선배인 이승배 씨와 노동운동을 함께 했다. 노 의원은 2015년 방송 인터뷰에서 "심 (전) 대표 남편분은 저에게 과거 제 학교의 선배이고 같은 시기에 노동운동도 함께 했던 분이고, 제가 남편분을 먼저 알고 지냈고 제가 굉장히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이라고 말했다. 또 "제가 두 사람이 결혼 후에는 정치적 동반자로서 오늘까지 한배를 타고 오고 있고, 늘 이제 또 저희가 성이 (노 씨, 심 씨) 그렇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그런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노 의원은 20대 총선을 두 달여 앞둔 지난 2016년 3월 댓글 공작 주범인 '드루킹' 측근 도모 변호사로부터 4000만 원이 넘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특검 수사 대상에 오른 그는 23일 오전 9시 38분께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 17~18층 계단 창문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

장례는 '정의당 장(葬)'으로 5일간 치러지며 오는 27일 발인 및 국회 영결식이 엄수될 예정이다. '정치적 벗'을 떠나보내는 심 의원이 호상(護喪, 장례 총괄 책임자)을 맡는다.

shincomb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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