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 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참정권에 차별을 둘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시각·청각·발달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참정권 행사는 또 하나의 벽이다. 후보자가 누구인지, 공약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주권자인 이들에겐 극히 제한적인 정보뿐이다. 2007년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됐지만, 현실은 여전히 '소수자'로 차별받는다. 이에 <더팩트>는 장애인의 투표할 권리 보장을 위한 일환으로 '투게더 6·13-장애인 참정권'을 기획,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발달장애인지원비영리단체 '소소한 소통', '지방선거장애인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현직 국회의원' 등과 함께 장애인 참정권 실태와 대안을 취재했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투표 체험 ▲선거 공보물 ▲각 당의 장애인 공약의 현실성 ▲인터뷰 ▲전문가 진단 등을 주제로 싣는다. <편집자 주>
왜 이렇게 높은 곳에?…선관위 개선 나섰지만 문제 여전
[더팩트ㅣ서울역=이원석 기자·임현경 인턴기자] 휠체어에 오른 취재진은 어딜 가나 힐끗거리는 눈빛과 나즈막이 혀 차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애써 웃어 보였지만, 쏟아지는 동정과 불편한 표정에 한없이 작아졌다. 단 하루 만의 일이었다. 장애인들이 '웃음으로 운다'는 그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선거의 계절이다. 19세 이상 국민이라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는 참정권을 가진다. 참정권(參政權). 주권자로서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오는 13일은 전국 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다. 국민들은 유권자로서 투표를 통해 자신들을 대표할 기초 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국회의원을 선출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정말 사전적 의미대로 우리 국민 모두가 이 참정권을 누릴 수 있을까. 국민이라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지만, 반대로 누구나 다 쉽게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에겐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것이 '큰 산'을 넘는 것과도 같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보건복지부의 자료를 이용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19세 이상 장애인 수는 약 245만 명이다. 또, 선관위가 2012년 장애 유권자 및 장애인단체 관계자(212명)를 대상으로 장애인 참정권 보장에 대해 조사한 결과, 71.7%가 '안 되어 있다(전혀 6.1%+대체로 65.6%)'고 응답했다. 반면 '잘 되어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는 26.9%에 불과했다. 또, 장애인이 투표 참여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으로는 '거동 불편으로 인한 투표소까지의 이동 어려움(30.2%)'을 꼽았다.
6년이 지났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러 장애 당사자, 이 분야 전문가들은 이동 어려움을 호소했다. 선관위의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더팩트> 취재진은 장애인들의 투표가 얼마나 힘겨운지 알아보기로 했다. 휠체어를 타고서 직접 모의 투표장을 찾아갔다.
◆ 장애인 투표, '산 넘어 산'…힘들어도 너무 힘들다
취재진은 지난달 31일 오후 휠체어를 대여해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가 마련한 서울역 역사 내 3층에 위치한 '아름다운 선거 정보관'에선 모의 투표를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장소는 오는 8일과 9일에 사전투표가 이뤄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취재진은 서울역 광장에서부터 휠체어를 타고 역사 3층에 올라가 모의 투표를 한 뒤 다시 광장으로 돌아오는 순서로 체험을 실시하기로 했다.
거리에서 봤던 능숙한 모습과 달리 휠체어를 다루는 일은 쉽지 않았다. 바퀴를 굴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일단 손바닥이 바퀴에 닿아 새까맣게 때가 탔다. 아스팔트 균열에 바퀴가 빠져 헛돌면 아무리 손을 저어도 벗어날 수 없었고, 울퉁불퉁한 곳을 지날 때마다 꼬리뼈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선배 기자가 보조인으로 동행하지 않았다면 서울역까지 오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몸이 불편한 것보다 생소했던 건 두 다리 위로 꽂히는 시선이었다. 두 눈으로 위아래를 바쁘게 훑은 뒤엔 꼭 눈을 맞추고 '그래, 고생이 많네'하는 눈빛을 보냈다. 위해주는 마음은 감사했지만, 그건 배려보단 동정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역 3층'은 일반적인 건물의 3층과는 다르다. 승강기를 타고 한 번에 3층에 올라갈 수 없다. 광장에서 한 층을 올라가면 2층, 그곳은 서울역 본관이 위치한 층이다. 거기서 본관 안으로 들어가서 또, 한 층을 올라가야 3층이다. 장애인에겐 상당히 험준한 코스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광장에서 한 층을 올라가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으나 엘리베이터를 찾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저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가보라'며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멀리 건물 뒤쪽으로 한참을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나마 가까운 정문 계단 옆 장애인용 경사로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경사가 꽤 가팔라서,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슬슬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미로처럼 꼬여있는 경사로에서는 좌회전, 우회전, 또 좌회전, 가뜩이나 폭이 좁은 곳에서 서너 번의 '코너 주행'을 해야 했다. 휠체어 옆이 벽을 스치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입에서는 '아~'라는 외마디만 나올 뿐이었다. 뒤에서 밀어주는 선배 기자도 지친 기색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벽에 긁히는 일이 잦아졌다.
오죽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시민이 "힘 좀 써봐라. 이래서 애인을 잘 둬야 한다"고 말했을까. 물론 애인 사이도 아니었지만. 가장 작은 휠체어도 이 정도인데, 조금 더 크고 안락한 휠체어를 탔다면 경사로에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본관 입구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면 승강기가 있겠지' 기대감을 갖고 팔을 굴렀다. 휠체어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타고 매끄럽게 굴러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역사를 아무리 살펴봐도 3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를 찾을 수 없었다. 3층 양쪽으로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는 있었지만, 승강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계단엔 리프트가 없었고, 에스컬레이터는 폭이 좁아 휠체어가 올라갈 수 없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본 끝에 안내데스크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 승강기는 없냐'고 묻자 '도넛 가게 뒤에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정작 도넛 가게 뒤엔 외롭게 선 현금인출기가 전부였고, 멀리 떨어진 구석에서 승강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도넛 가게가 건물 내 여러 군데 입점해 혼선을 빚은 것이었다.
혼자서는 도무지 찾기 힘든 장소였다. 우여곡절 끝에 3층에 도착하니 열차 탑승구 앞에 임시로 세워놓은 벽이 보였다. 이제 겨우 투표소에 들어섰을 뿐이었지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손목과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모든 일과가 끝난 것처럼 힘이 쭉 빠져버렸다. 그래도 투표는 마쳐야 했다.
취재진이 투표를 모두 마치고 시작했던 장소로 되돌아오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총 50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10분 내외로 끝날 일이었으나 거의 5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돌이켜보니 1층에도 투표소를 마련할 만한 공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왜 그렇게 높은 곳에 투표소를 설치해야 했는지 의문, 아니 원망스러웠다.
◆장애인에겐 너무 '멀고 높은' 투표소
물론 한 번의 휠체어 체험으로 장애인의 고충을 모두 알 수는 없다.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1층에 있거나 승강기를 이용할 수 있는 투표소는 사전투표소 3512곳 중 2897곳(82.5%), 선거 당일 투표소 1만4134곳 중 1만3898곳(98.3%)이다. 2층 이상의 위치에 있지만 승강기를 이용할 수 없는 투표소가 236곳 이상 있다는 뜻이다.
선관위는 매번 전국 단위 선거가 돌아올 때마다 이 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취재진이 지난달 30일부터 31일까지 서울에 위치한 사전투표소를 무작위로 찾아가 본 결과, '불편한 투표소'의 체감 확률은 17.5% 이상이었다. 투표소가 언덕 위에 있거나 2층 이상에 설치됐는데도 승강기가 없는 곳이 많았다. 통계상의 개선사항과 직접 경험하는 환경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지체 장애와 약간의 지적 장애가 있는 A 씨(21·남) 부모는 올해 A 씨와 함께 투표소에 가볼 계획이다. 그들이 사는 곳에 배정된 투표소 또한 언덕에 위치한 동사무소였다. 실제 A 씨의 가족이 사는 지역의 투표소는 높은 언덕에 위치한 동주민센터 3층이었다. 승강기도 없다. 몸무게가 꽤 나가는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투표소에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투표가 무엇인지, 누굴 뽑아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두려움이 앞선다. 지체 장애로 인해 혼자서 걸을 수 없는 A 씨가 해당 투표소를 이용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A 씨의 부모는 주변의 다른 투표소를 찾아 '사전투표'를 할 계획이다. 사전투표는 지역에 상관없이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의 경우는 어떨까. 선진국의 장애인에 대한 참정권 보장정책은 아주 세세하게 정비돼 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선 장애인 투표 편의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또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 투표용지는 물론이고 도우미까지 배치하게 돼 있다. 심지어 투표장에는 장애인용 주차시설과 화장실 설치도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각 주마다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참정권 보장에 큰 신경을 쓰고 있다. 140개의 선거구를 가진 워싱턴DC의 경우엔 시각장애인을 위해 돋보기, 큰 활자로 만들어진 투표안내사항, 포스터 크기의 샘플 투표용지 등을 제공하며 장애인의 경우 투표관리인이나 그들이 선택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와이에선 장애인들이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고 길가에서도 투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날 취재진은 잠깐의 체험으로도 녹초가 돼버렸다. 극히 일부만을 엿봤지만,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깨달았다. 거리에서 장애인을 쉽게 볼 수 없는 건 그만큼 인원이 적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밖으로 나가기 힘든 환경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장애인의 90%는 질병, 사고 등 후천적 요인으로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곧 언제, 누구라도 장애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장애인 참정권을 위한 노력은 선관위만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국민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시작은 같은 국민으로서 기본권을 동등하게 누릴 때부터가 아닐까.
이원석 기자 : "장애인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정치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와 이 기사를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그 노력이 분명 필요하다고 확신합니다. 이번 기획 기사의 이름은 '투게더 6·13'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요. 장애인들이 차별받지 않는 '나라다운 나라', '사람 사는 세상'."
임현경 인턴기자 : "휠체어에 올라보니 도로에 난 작은 균열에도 바퀴가 헛돌았고 좁고 경사진 골목에 앞길이 막혔으며 드물게 엘리베이터가 있다 해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가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참정권은 물론 기본권 자체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끔 '제대로 된' 환경이 만들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