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철영 기자] "폭풍 속을 걷고 있다면 폭풍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아야죠."
영화 '스파이 게임'의 대사가 부쩍 생각나는 요즘이다. 다음 달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인 북미정상회담을 바라보고 있는 한반도, 혹은 문재인 대통령의 심정도 아마 이렇지 않을까 싶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밀당(밀고 당기기)'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미국과 북한은 현재 다음 달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과 싱가포르에서 실무협상을 진행 중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소식들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과의 시차 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매일 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를 확인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북·미 간 실무회담이지만, 한반도의 운명을 생각할 때 우리 정부와 절대 무관치 않다. 북한과 미국이 정상회담 의제를 놓고 매일 같이 폭풍우를 만들고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우리 역시 그 폭풍의 진원지와 방향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지난 24일 트럼프 대통령은 돌연 북미정상회담 취소를 알렸다. 우리 정부의 대응을 봤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급히 NSC를 소집해 진위 파악에 나섰고, 정치권도 잠시나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북한은 다음 날 미국에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다"며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후 한반도 상황은 또 급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고, 문 대통령은 지난 26일 북측 판문각에서 김 위원장과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비공개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한반도 비핵화에 의견을 모았고, 북·미 양국은 실무회담을 시작했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상황을 놓고 일각에서는 게임(Game)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이 게임에서는 한쪽이 이기는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북한과 미국 그리고 한국까지 포함한 모두가 승리하는 그런 게임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북·미 양국의 실무회담을 보는 게 조마조마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언제라도 또 한쪽에서 판을 뒤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6월 12일 정상회담을 전제로 진행되는 북·미 간 실무회담은 이런 이유로 게임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톰 비숍(브레드 피트) :이건 게임이 아니에요!
네이단 뮈어(로버트 레드포드) :게임이야, 바로 그거야. 물론 애들 장난도 아니지. 완전 차원이 다른 게임이야. 심각하고 위험하며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이지.
톰: 웃기지도 않는 규칙은 때려치워요!
네이단: 하지만 그 규칙이 자넬 살렸어.
영화 <스파이 게임>의 대사다. 동독에서 누군가를 데려와야 했지만, 정보가 새나가면서 그를 버려두고 혼자서 돌아온 후 톰과 네이단이 나눈 대화다. 네이단은 톰이 규칙에서 벗어났다면 살지 못했을 것을 지적한 것이다.
게임에는 분명한 룰이 있다. 이 룰은 게임에서 넘어서는 안 되는 보이지 않는 선, 혹은 정해진 선을 의미한다. 북·미 양국의 현재 실무회담도 보이지 않는 룰 안에서 각자의 선을 지키며 진행되고 있다. 다만, 양국 모두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조금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한 '중재자'의 역할이 필요한 것도 이런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북·미 간 협상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은 또 크게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 지난 수십 년의 역사가 그래왔다. 아쉬운 점은 그 요동치는 정세에서 한국은 늘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현재 상황이 "아주 소중한 기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리잔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한 번쯤 이런 생각도 해본다. 네이단이 중국 감옥에 갇힌 톰을 포기하려는 CIA에 했던 말처럼 말이다.
"방학이면 농장이 있는 삼촌 집에 갔었죠. 거기엔 삼촌과 매일 함께 일하던 경작용 말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정말 아끼셨죠. 하루는 말이 다리를 절면서 왔습니다. 간신히 서 있더군요. 남들이 대신 죽여주겠다고 하니 삼촌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왜 내 말을 남이 죽이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