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들의 추락에 왜 내가 더 화가 날까
[더팩트|임태순 칼럼니스트] 저항시인 김지하 씨는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구설수에 올랐다. 대학생이던 1970년 대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해 수난을 겪었던 그가 자신을 사형수로 만들었던 가해자의 딸인 박근혜 손을 들어주었으니 ‘역사와의 화해’니 ‘변절’이라느니 이런 저런 뒷말이 오갈 법도 하다.
그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잃은 뒤 18년을 고통 속에서 지냈으면 내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 박근혜 후보를 한번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고통을 에너지화해 정치를 하면 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최순실 같은 여자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말해 사람을 잘못 봤음을 인정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지사 등 권력자들의 추락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다. ‘청계천 신화’의 주인공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동차 부품업체인 다스 소유 의혹과 국가정보원 특별활동비 수수 의혹 등 여러 가지 혐의와 관련, 최근 검찰에 불려나갔다.
그는 검찰청사 포토라인에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참담하다고 했지만 오히려 참담한 것은 그를 한 때 대통령으로 뽑았던 국민들이다. 많은 국민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은 4대강 건설, 국정원 댓글사건 등 정책 보다는 다스 소송비를 삼성이 대납하게 한 개인비리 의혹 때문이다. 국민들은 누구 못지 않게 재산이 상당한 이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이용, 다스의 미국 소송비 100억 원을 삼성이 내도록 하고, 소송에 이긴 뒤에도 다스에 투자한 소액투자자들의 손해는 내팽겨둔 채 자신의 손실만을 챙긴 치졸함, 뻔뻔함에 더 분노하고 있다.
과연 저런 깜냥의 사람을 뭐에 씌어 대통령으로 선출해 국정을 맡겼을까 하고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TV화면을 보면 그의 측근들도 많이 떠난 듯하다. 김백준, 김희중 등 그의 오랜 집사들은 검찰수사 과정에서 등을 돌렸으며, 그가 행차하면 도열해 있던 정계 인사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개인 잇속을 챙긴 후안무치한 행동에 대한 실망감이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부하직원에 대한 성폭행 의혹과 관련 검찰 조사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도 이만 저만 아니다. 그는 지난해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적폐 청산을 외치는 기존의 흐름과 달리 “이승만‧박정희의 긍정적 요소만 기록하자. 이제 정파적 싸움은 극복하자”고 말해 중도‧보수 유권자들의 호감을 샀고, 이로 인해 지지기반의 외연도 넓혔다.
비록 문재인 후보에 져 대선후보로 선출되지 못했지만 이런 참신성과 열린 자세로 줄곧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꼽혀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그가 파렴치하고 수치스런 성격의 성범죄를 저질렀다니 잘 믿겨지지 않는다. 또 국가발전, 사회정의를 입버릇처럼 말해온 지도자가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그것도 여성의 성을 짓밟았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지킬박사와 하이드같은 이중성에는 할 말을 잃게 한다. 자신이 모시던 사람이 불미스런 일에 연루되다 보니 그를 모시던 측근들도 그가 사임하자마자 즉시 충남도청을 떠났다. 더 이상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 역시 그에게 괜찮은 감정을 가졌지만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옛말도 있지만 사람보는 것의 어려움을 새삼 느낀다. 권력층 인사의 추락은 그 혼자만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지 않는다. 한 때 그의 신념, 소신에 마음을 보냈던 사람들까지 무색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전이(轉移)현상을 가져온다. 여기에 더해 허탈감, 배신감 등의 감정이 더해져 충격이 더 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국정교과서, 4대강 건설사업은 비난하고 욕하고 국회에서 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최순실에 놀아나고, 대기업에 소송비를 대납하게 하고, 부하직원을 성폭행한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안된다. 그래서 그저 속만 끓고 화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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