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성남=이철영·신진환·이원석 기자] 양승태(70) 전 대법원장이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법조계는 물론 사회 각계에서 진실 규명 여론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의혹을 묻는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오히려 역정을 내며 예의를 따졌다.
4일 오전 <더팩트> 취재진은 경기도 성남의 한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만나 직격 인터뷰를 시도했다. 기독교 신자인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오전 9시께 아내와 함께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경기 성남시의 모 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1시간 15분 가량 예배를 마치고 나온 그는 교회 지하주차장에서 취재진과 마주했다. 취재진을 확인한 양 전 대법원장은 "왜 이래요"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취재진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사법정책과 사법부 체계 등에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낸 법관들의 목록을 작성·관리했다는 의혹에 대해 말해달라'고 물었지만 오히려 역정을 냈다.
취재진이 '법원 추가조사위의 사법부 블랙리스트 발표에 대해 인정하느냐'고 재차 물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한 말씀만 해달라"는 요청에도 그는 묵묵부답으로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는 취재진의 취재에 "예의가 있어야지"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며, 교회를 빠져나갔다.
취재진은 양 전 대법원장의 입을 통해 말을 듣고자 교회 인근의 자택을 찾아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집으로 귀가한 양 전 원장을 확인한 후 초인종을 눌렀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파문'은 대법원의 추가 진상조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확산되는 분위기다. 시민단체 등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고발하며 진실규명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전국 최대 규모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추가조사 결과에 대해 6일 판사회의를 열고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정황을 밝혀낸 법원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관한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수원지법 판사들은 지난달 29일 회의를 갖고 내부망에 "대법원장에게 향후 진행될 후속 조사가 성역 없이 공정하게 이뤄질 것과 이번 사건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판사회의는 이후 의정부지법, 서울가정법원, 서울남부지법에서도 열렸으며 향후 전국 법원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 판사들의 동향을 수집하고 명단을 관리하면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지난해 4월 진상조사에서 사실무근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법원행정처 컴퓨터 등을 검증해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되자 김명수 대법원장은 추가조사위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인 뒤 지난달 22일 결과를 발표했다.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특정 법관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을 염두에 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양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학술 모임이나 판사들의 동향을 부적절한 방법을 통해 수집한 정황을 담은 문건 등이 공개되며 파문이 일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법관 동향파악'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거나 지휘한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이를 알고 있지 않았겠냐는 의혹은 남아 있다.
법조인 출신 한 국회의원은 이날 <더팩트>와 통화에서 "임종헌(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조사가 이뤄져야 하는데, 현재 그분의 하드디스크는 전혀 못 봤다.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는 조심스럽다"고 전제하면서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곳이기에 아마도 양 전 대법원장이 알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의 PC는 법원행정처의 반대로 추가조사위의 분석 대상에서 제외됐다.
양 대법원장 재임 시절인 2012년 재임용에 탈락해 법복을 벗은 서기호 변호사는 지난달 26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일상적이고 조직적인 법관 감시와 통제, 원세훈 재판에 대한 청와대와의 교감 등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직접 지시나 묵인 없이 진행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2차 추가조사에서도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추가조사 과정에서 양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부 판사들의 동향과 성향을 파악해 문서로 남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애초 이 의혹의 발단은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특정 성향의 판사 명단을 만들어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는 의혹을 품은 시민단체 투기자본감시센터가 양 전 대법원장 등 전·현직 고위법관 8명을 고발하면서 불거졌다. 단체는 또, 국가정보원을 통해 법관을 사찰하고 재판에 개입하려 했다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 4명을 같은 혐의로 고발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법관 사찰' 논란과 함께 특정 사건에 관해 청와대와 교감한 정황도 발견되기도 했다. 양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와 동향 정보를 주고받았던 정황이 나타난 것이다.
추가조사위에 따르면 압수한 법원행정처 컴퓨터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항소심 판결 관련 문건도 포함됐다. 문건에는 당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원 전 원장 2심 재판 결과(징역 3년)에 큰 불만을 표시하면서 전원합의체에 회부되기를 희망했고, 이에 대해 법원행정처는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통해 사법부의 진의가 곡해되지 않도록 상세히 입장을 설명함"이라고 기록했다. 실제 원 전 원장 사건은 상고심에서 전원합의체에 회부돼 파기환송됐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의 훼손이라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는 한편 양 전 대법원장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법학교수 및 연구자 120명은 지난 1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양 전 대법원장, 임 전 차장 및 직원 등 당시 책임자들을 상대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 및 공용서류 등 무효죄를 적용해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앞서 시민단체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양 전 대법원장 등 전·현직 고위 법관 14명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검찰에 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