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김기춘 '블랙리스트' 항소심, '팩스번호' 증명력에 달렸다

17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 공판이 시작됐다. 사진은 1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모습. /이덕인 기자

[더팩트 | 서울중앙지법=김소희 기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항소심 첫 공판에서는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이 김 전 실장을 통해 모철민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에게 전달했는지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김 전 실장과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해당 문건이 팩스로 전달된 것을 근거로 '증거입증이 된다'와 '되지 않는다'는 상반된 주장을 내놔 주목을 끌었다.

17일 서울고법 형사3부(부장판사 조영철) 심리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 첫 공판이 열렸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가동에 핵심 원료로 이용된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을 각 수석실에 전달했다는 의혹에 대해 "국가정보원이 국정원법에 따라서 대통령에게 하는 보고이며, 이를 받은 비서실장이 업무상 참고하라는 취지로 각 수석에게 전달한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문건은 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 선정 배제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실장은 "오히려 이 같은 문건을 묵살하는 게 직무유기가 될 것"이라면서 "위법 행위로 보는 것에 대해 의문이다"고 했다.

특히 김 전 실장은 특검이 '김 전 실장이 모 전 수석에게 블랙리스트 실행 지시를 하달하기 위해 건넸다'며 재판부에 제출한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에 대해 "책임자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앞서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황병헌)가 판결문을 통해 "김 전 실장이 국정원 작성 문건을 모철민 당시 청와대 교문수석에게 전달하여 '개선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점이 사실로 인정된다"고 판시한 것에 대한 반박이다.

1심 재판부는 해당 국정원 문건에 대해 '폐단'이라고 지적한 뒤 "피고인 김기춘은 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 선정배제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그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보고받고 승인했으며, 그 지시 및 승인에 따라 청와대가 문체부를 통해 책임심의위원회 선정 배제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비서실장으로서의 지위, 역할이나 전체 범행 경과에 대한 지배 내지 장악력 등을 종합해 볼 때 단순한 공모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본질적 기여를 통한 기능적 행위를 지배했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이 문건의 연결고리를 김 전 실장으로 봤다. 국정원에서 김 전 실장, 그리고 모 전 수석을 거쳐 유 전 장관에게 전달됐고, 다시 유 전 장관이 '대책 방안'을 마련해 김 전 실장에게 보고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17일 조윤선 전 장관이 블랙리스트 사건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석달여 만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덕인 기자

김 전 실장은 이날 "해당 문건은 문화체육관광부 압수수색에서 나온 문건으로 팩스 번호가 없다. 문건 상단에 '김기춘' 친필 사인도 없다"며 "특검이 피고인에 대해 (아무 것도 나와있지 않은) 문건을 모 전 수석에게 주고, 유진룡 당시 문체부 장관에게 가서 지원 배제 지시를 하달했다고 주장하는 건 입증 원칙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특검은 이 같은 김 전 실장 측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다"고 되받아쳤다. 특검은 "국정원 문화계 지원배제 정보보고 문건은 문체부 예술과에서 증거자료로 제출한 문건과 동일하다"면서 "팩스 송부 사실도 문건 자체로 각인돼 있다. 또 모 전 수석이 법정에서 피고인으로부터 그런 지시를 받았고, 이를 문체부에 지시했다고 증언했다"고 했다.

김 전 실장 측은 '불분명한 팩스번호'를 재차 근거로 대며 물러서지 않고 변론을 펼쳤다. 변호인은 "(해당 문건의) 원본을 본 적이 있는데 팩스 번호도 나와있지 않고, 어디서 언제 누가 보냈는지 안 나와있다"며 "피고인은 누군가에게 줄 때 확실히 하기 위해 '어떤 수석에게 어떻게 참고하라'고 반드시 친필로 쓴다"고 했다.

법조계에서는 김 전 실장과 특검이 앞으로 진행될 공판에서 국정원 정보보고 문건이 팩스로 전달됐는지 여부를 두고 치열하게 법리다툼을 벌일 것이라 예측했다.

법무법인 건우 이돈필 변호사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이날 양측이 주장한 '팩스 번호'는 증거능력의 문제가 아닌 증명력의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당 문서가 증거로써 활용되고 범죄 증명의 자료가 되기 위해선 '진정성립'→증거능력 검토→증명력 판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판부는 문건에 대한 위·변조 사실이 없다는 것과 작성자가 체험한 내용인지 등을 따져 재판 증거로 쓸 수 있을지 ('증거능력'을) 판단한다. 증거로 채택되면 혐의를 증명할 만한 증명력이 있는지 검증한다.

이 변호사는 "김기춘 전 실장 측은 해당 문건에 대해 평소 김기춘 전 실장이 '이렇게 사인하고 이렇게 업무지시를 하달'하는데, 이 문서엔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특검은 모 전 수석의 증언 등에 따르면 팩스로 김 전 실장이 모 전 수석에 지시 하달했기 때문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며 "어느쪽 주장을 취사 선택할지는 모 전 수석을 비롯한 법정 증언과 기타 제반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재판부가 판단할 사안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양쪽의 법리다툼의 여지가 충분한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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