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서울중앙지법=김소희 기자] "판사님 저를 사형시켜주세요. 사형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를 죽여라. 대한민국 국민을 다 죽여라", "기자, 이 개돼지 같은 것들."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 심리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속행 공판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이날 진행된 80차 공판은 지난 13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후 처음 진행된 재판이다. 당초 어느 정도 소동이 있을 것임을 예상한 듯 방청객보다 더 많은 수의 경위들이 재판정 안에 배치됐다. 앞줄은 평소보다 많은 수의 취재진이 자리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도 30여 명 재판장을 찾았다.
재판이 시작되고, 감색 코트를 입고 머리핀으로 머리를 고정한 박 전 대통령이 등장했다. 박 전 대통령이 모습을 드러내자 일부 지지자들이 술렁였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는 평소보다 어두운 표정으로 재판부에 박 전 대통령의 발언기회를 구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해 앉아서 발언하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안경을 쓴 채 자리에 앉아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유 변호사로부터 한 장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종이를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첫 공판에서 "변호인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짤막하게 밝힌 이후 낸 첫 입장 표명이었다.
"구속되어 주 4회씩 재판을 받은 지난 6개월은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배신으로 되돌아왔고 이로 인해 저는 모든 명예와 삶을 잃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던 공직자들과 국가경제를 위해 노력하시던 기업인들이 피고인으로 전락한 채 재판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염려해주시는 분들께 송구한 마음으로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마음으로 담담히 견뎌왔습니다.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과 법이 정한 절차를 지켜야한다는 생각에 심신의 고통을 인내했습니다. 저는 롯데 SK뿐만 아니라 재임기간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사실이 없습니다. 재판 과정에서도 해당 의혹은 사실이 아님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저에 대한 구속 기한이 끝나는 날이었으나 재판부는 검찰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13일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6개월 동안 수사하고 법원은 다시 6개월 동안 재판했는데 다시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변호인들은 물론 저역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변호인단은 사임의 의사를 전해왔습니다. 이제 정치적 외풍과 여론의 압력에도 오직 헌법과 양심에 따른 재판을 할것이라는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향후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을 겪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믿고 지지해주시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합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저에게 묻고 저로 인해 법정에선 공직자들과 기업인들에게는 관용이 있기를 바랍니다."
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는 과거 당 대표 시절, 대통령 재직시절 특유의 연설투 그대로였다. 그러나 '사사로운 인연'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는 목소리가 다소 흔들리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차분했던 발언이 끝나자, 재판부는 다시 한 번 술렁였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10분간의 휴정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퇴정했다.
이때부터 재판정 내부에선 소란이 시작됐다. 재판부는 이들을 향해 "정숙을 유지해달라"고 말했지만, 소용 없었다. 지지자들은 기자들을 향해 "개돼지들", "연방제 되면 너넨 다 총살이다"라며 거친 욕설을 쏟아냈다. 한 70대 여성은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며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폭풍같았던 10분이 흐르고 오전 10시 30분 재판이 재개됐다. 박 전 대통령은 종전과 같은 모습으로 재판장에 들어왔다.
유영하 변호사는 "재판 진행절차에 대해 말씀 올리겠다"며 재판부에 또 한 번 발언 기회를 얻었다. 유 변호사는 지난 13일 추가 구속영장 발부 사유가 된 SK·롯데 관련 제3자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나갔다.
유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리라고 본 재판부를 무한히 신뢰했다"면서 "재판 기간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극한의 인내로 참아왔으며 심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4회 공판기일을 견뎌왔다. 이번 사건이 지니는 역사적인 중요성과 소명의식에 변호인들은 성실히 임해왔다고 자부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무죄추정의 원칙과 불구속재판이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저희 변호인들은 더이상 본 재판부에 진행할 향후 재판절차에 관여해야 할 어떠한 당위성도 느끼지 못한다"며 "피고인을 위한 어떠한 변론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사임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유 변호사는 "저희 변호인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과 피울음을 토하는 심정을 억누르면서 더럽고 살기가 가득한 이 법정에 피고인을 홀로 두고 떠난다"며 "피고인에 대한 본 재판부의 추가 구속영장 발부는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사법역사상 치욕적인 흑역사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변호사의 발언 중간중간 방청석에서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파란색 옷을 입은 50대 여성은 돌연 재판부를 향해 "판사님 저를 사형시켜주세요. 사형을 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단식을 했습니다"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이 여성은 소리를 지르며 재판부를 향해 "나를 사형하라"고 외쳤다. 급기야 이 여성은 자리에 누워 사지를 덜덜 떨며 실신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성도 "나를 죽여라. 대한민국 국민 다 죽여라" 라며 울부짖으며 뛰어들었다. 재판정 안에 있던 경위들은 이들을 데리고 재판정 밖으로 나갔다.
재판부도 박 전 대통령 변호인 전원 사퇴에 대해 '재고해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우리 재판부는 어떠한 재판 외적인 고려 없이 구속 사유를 심리해 영장 재발부를 결정했다"며 "변호인이 전부 사퇴하면 공판 자체를 진행할 수 없다. 피고인이 새로운 변호인을 선임하거나 국선변호인은 선임해야 하는데, 새 변호인들이 10만 쪽이 넘는 수사기록과 그동안 재판기록을 검토해야 해서 심리가 상당 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전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사건이다. 피고인 방어권이 침해되지 않는 한도에서 신속히 진행해 사안의 실제적 진실을 국민 앞에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와 같은 이유로 지연되면 미결구금일수 증가해서 피고인에게 그 피해가 돌아가게 된다. 재판부는 (해당 재판에 대해) 예단 없이 백지에서 진행된 뒤 판단하려고 이미 신문한 증인도 대부분 구속영장 재발부해서 심리기일 선고기일 추정해둔 상태다. 재판부는 어떤 예단 없이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이날 예정된 증인신문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재판을 종료했다. 재판부는 기존 변호인단이 사임 여부에 대해 재고할 시간, 또는 박 전 대통령이 새 변호인을 선임하는 데 필요한 시간 등을 고려해 17일 예정된 재판도 연기했다. 81차 공판은 오는 19일 안종범 전 경제수석의 증인신문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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