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상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려워할 필요도, 거부감을 가질 이유도 없습니다. <더팩트>는 법조계에서 이슈로 떠오른 '특별한' 판결을 소개하는 [TF화제의 판결]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해당 판결이 화제가 된 사연을 비롯해 판결문을 알기 쉽게 설명해드립니다. 법치국가에서 '법을 모르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경우라고 합니다. 이 코너를 통해 '법을 아는 사람'이 되길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더팩트 | 서울중앙지법=김소희 기자] 부부싸움 중 화가 난 남편이 "죽겠다"고 말하자, 아내는 제초제를 건넸다. 남편은 홧김에 이를 마셨고, 며칠 후 농약 중독으로 사망했다. 남편은 죽기 전 아내가 제초제를 건넸다는 내용의 녹음 파일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아내는 1·2심을 비롯해 대법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해당 '녹음 파일'은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형사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최근 자살 방조 혐의로 기소된 신모(62) 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심리미진 또는 채증법칙 위반으로 인한 사실오인의 위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신 씨는 2015년 5월 1일 고기잡이 그물을 분실한 남편 김모(당시 58세) 씨와 말다툼을 벌였다. 김 씨는 부부싸움 도중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며 "죽어버리겠다"고 말했고, 이에 신 씨는 "이거 먹고 콱 죽어라"라며 집 안에 있던 제초제가 담긴 드링크병을 김 씨에게 건넨 뒤 자리를 떴다. 김 씨는 제초제를 마신 뒤 토해냈지만, 같은 달 9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농약 중독으로 사망했다.
재판에서는 김 씨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작성한 '신 씨가 제초제를 갖다 줬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와 병문안을 왔던 김 씨의 딸이 녹음한 김 씨의 음성 파일이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대법원을 비롯해 1·2심은 "제출된 증거만으로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정도로 범죄 혐의가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1·2심은 "김 씨의 딸이 제출한 녹음 파일은 딸이 어떤 질문을 했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가 전혀 없이 대답 부분만 남아있어 녹음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유무를 판단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김 씨의 자필 메모, 그리고 김 씨의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 있지만 법원은 "무죄"라고 본 이유는 뭘까.
한국전기공사협회 법령제도팀 전홍규 변호사는 <더팩트>에 이번 판결에 대해 "증거 능력 판단은 법원의 재량"이라며 "해당 증거는 객관적 사실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은 타당했다고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 변호사는 이어 "USB 파일이나 전자 파일에 대해 증거능력이 인정되는지 여부 그리고 증거로 본다면 증거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본'인지 여부가 중요하다"며 "질문이나 의도가 잘려있다는 건 정상적인 원본파일이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즉, 자살방조죄가 성립하려면 자살하려는 사람의 의도를 인식하고 실제로 행위를 도와주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 씨의 딸이 제출한 녹음 파일은 김 씨의 대답 부분만 남아있어 어떤 질문이 어떤 의도를 담고 나왔는지 판단될 수 없고, 따라서 증거 능력 자체가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상 당시 상황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법원이 일방의 답변만 나온 녹음만으로 신 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의 메모와 녹음 진술은 신 씨가 농약을 건네줬다는 간략한 내용에 불과하고, 농약을 건네준 시기와 경위 등 구체적인 정황은 담겨있지 않아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 변호사는 "딸과 아버지 사이에서 녹음됐기 때문에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하고 있진 않지만, 녹음 자체만으로는 추정 밖에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ksh@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