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초점] 화려한 정치 이력…與 대선주자 면면은?

대선주자로 나선 새누리당 원유철·안상수 의원과 이인제 전 의원(왼쪽부터). /배정한·남윤호 기자·더팩트 DB

[더팩트ㅣ신진환 기자] 대선주자 구인난을 겪어 '불임정당'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던 새누리당이 '부자'가 됐다. 이인제 전 의원을 필두로 원유철, 안상수 의원이 대권에 도전하면서 새누리당 대선주자가 3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이 '옥동자'로 칭할만큼 새누리당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현재까지 공식 대권 출마를 선언한 새누리당의 대선주자의 면면을 살펴 보자.

◆ 최연소 도의원 출신 원유철

원유철(왼쪽 두번째) 새누리당 의원의 지난 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배정한 기자

원 의원은 1962년 경기 평택 출신으로 고려대 철학과·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만 28세 최연소의 나이로 경기도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지난 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28세 말단 회사원 신분으로 월세 살면서 경기도의회에 도전, 최연소 도의원이 됐다"고 자신을 소개할 정도로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한 성공 신화는 그의 자랑이다.

이후 1996년 경기 평택에서 무소속으로 선거를 치르고 당선, 제15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에 입당해 부대변인을 맡는 등 당직자로도 활동했다.

정계에 진출한 뒤 탄탄대로를 걸었던 원 의원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97년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를 지지, 함께 탈당하고 이 후보가 주도한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이 후보는 분투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민신당은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한다. 이 때문에 원 의원은 여당 의원이 된다.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거셌던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그해 11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원 의원은 지난 2012년 당 대표, 2014년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쓴잔을 들이켰다. 이듬해 원내대표 경선 출마를 고심하다 자신보다 선수가 낮은 3선의 유승민 의원의 러닝메이트로 나서 승리한다. 4선 신분이 여당 정책위의장에 당선된 최초의 사례였다. 유 의원이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혀 원내대표직을 사퇴한 뒤 새 원내대표로 추대된다.

지난해 4·13 총선에서도 당선돼 5선(15·16·18·19·20대)의 업적을 이뤘다. 원 의원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태도와 원만한 성격으로 친화력이 좋고, 계파 색이 옅으며, 대표적 '핵무장론'자로서 국방·안보·통일 분야에 강점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인천시장만 8년…'행정통' 안상수

새누리당 대권주자 안상수 의원이 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본인의 저서 일자리 대통령 출판기념회를 열고 발언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1946년 충남 태안 출신인 안 의원은 서울대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여담으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당시 현장을 찾아 불에 탄 보온병을 포탄이라고 주장한 안상수(현 창원시장) 한나라당 대표와 다른 인물이다.

그는 기업인으로의 삶을 살았다. 동양선물 대표와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을 역임했다. 1996년 신한국당의 전문 경영인 영입 방침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제15대 총선과 제2회 지방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1999년 재보궐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 결국 15대 국회의원 금배지를 단다. 짧은 의정활동을 마치고 16대 총선에 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인천광역시장에 당선한 그는 행정가로 변모한다. 또 연임에 성공하면서 송도에 국제도시를 조성하고 2014 아시안게임 유치 등 세계가 주목하도록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안 의원은 인천시가 재정난에 허덕이게 한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첫 취임 당시 인천시 본청 부채는 6462억원이었지만, 퇴임 당시(2010년) 9조3950억원으로 14.5배나 폭증했다. 월미 모노레일과 세계도시축전 등 전시성 사업으로 인천이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안 의원은 시장을 퇴임한 뒤 한나라당 상임고문을 맡고 꾸준히 정계와 인연을 맺어갔다. 그러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 출마했으나 경선에서 탈락했다.

2015년 새누리당 인천시당 서구강화군을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맡으며 재기를 노리던 그는 그해 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20대 총선에서도 승리를 거머쥐며 3선 중진의원이 됐다.

◆ '피닉제' 이인제…대선만 네번째 도전

피닉제 이인제 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지난달 15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번이 네번째 대선 도전이다./남용희 기자

이 전 의원은 1948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 1981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법조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법복을 벗고 변호사 생활을 하다 1987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선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 전 의원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노동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93년 김영삼 정권 시절 만 45세 최연소 장관으로 제10대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그러다 1996년 경기지사를 거쳐 이듬해 신한국당의 대선 경선에 처음으로 도전했다.

당시 그는 대선 1차 경선 투표에서 이회창 후보(41.1%)에 이어 2위(14.72%)를 차지했다. 신한국당을 탈당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에 이은 3위를 차지했다.

이후 이 전 의원은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표 후보로 나섰으나 '복병' 노무현 후보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해 12월 민주당을 탈당한 뒤 자민련에 입당했고, 다시 민주당에 입당해 대선에 출마했다. 당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 등 6명의 후보 가운데 6위를 차지했다.

이 전 의원이 대권에 대한 갈망으로 여러 차례 당적을 바꾸면서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떠안았다. 그러나 '피닉제(불사조를 뜻하는 피닉스와 이인제의 합성어)'란 별칭을 얻기도 한다.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1년 통합 자유선진당에 입당, 19대 총선에서 당선돼 6선에 성공하면서 정계에 입지를 계속 다져갔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7선 고지에 도전한 그는 충남 논산·계룡·금산에서 추락하고 만다.

30여년 정치 경력을 쌓아오면서 10번 넘게 당적을 바꾼 이 전 의원은 지난달 15일 네번째 대선에 도전했다.

yaho1017@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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