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가수 서태지는 한때 신비주의의 대명사로 불렸다. 사전에 계획된 공연이나 방송출연 외에는 대중 노출을 극도로 꺼렸다. 이른바 '사생 팬'들이 달라붙었지만, 그들도 서태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먹는지, 누구와 만나는지 시시콜콜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정확한 사정은 아무도 몰랐다.
아마도 서태지는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일상이 낱낱이 공개된다는 것은 마치 유리전시관 속에서 사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숨기고 싶은 일도 있을 것이다. 팬들은 기대감이란 금빛 물감으로 자신을 덧칠했지만, 그 물감칠을 벗겨보면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자신의 민낯이 있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단점보다는 장점으로 인식되고픈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지아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가 서태지와 법률적으로 혼인한 사이이며,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대중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충격은 항상 그러하리라고 자신이 믿었던 생각, 즉 사고의 항상성(恒常性)이 무너진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태지의 신비주의는 일순 사라졌다. 마치 아침 햇살에 새벽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원래 신비(神秘)라는 것의 의미가 그렇다. 신비를 뜻하는 영어 미스틱(mjystic)은 그리스어 미스티코스(mystikos)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본래 '눈이나 입을 닫는다'는 의미이다. 좀더 풀이하면, 눈으로 볼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란 이야기이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는 이성적인 인식에 의하지 않고 초월적인 형태로 신(神)에 접촉하는 것을 뜻한다. 한자도 그렇다. 신(神)과 비밀(秘密)의 결합이다.
북극의 오로라를 직접 봤을 때, 사람들은 밤하늘에 펼쳐지는 '소리 없는 교향악'에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고비사막에서 헤매다 푸른 빛의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신비로움을 느낄 것이다. 한 여인의 눈을 바라보며 문득 "죽어도 좋다"는 감정이 밀려올 때 사랑의 신비를 체험할 것이다.
그렇다. 신비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볼 때, 입이 아니라 가슴으로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그 무엇이다. "눈은 실체를 바라볼 수 없고, 말은 진실을 담을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실 보는 것은 속이는 것이요, 말은 겉만 표현한다고 했다. 그래서 실체를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하고, 진실을 전하려면 입을 닫아야 한다고 했다. 인도인들이 눈과 눈 사이에 붉은 '띠까'를 찍은 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고,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진리를 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종종 신비주의를 가면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다. 짐짓 외면하고, 입을 닫으면서 미스틱(mystic)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사실 정면으로 바라볼 엄두나 용기가 없고 자신의 '깜냥'을 드러낼까 두려운 것인데, 팬(추종자)들은 이를 신비스럽다고 칭송한다. 어쩌면 가면은 서로가 필요할지 모른다. 쓰는 사람은 실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고, 보는 사람은 실체를 알고 싶지 않다.
'신비'가 아니라 '가면'인줄 알면서도 열광한다. 자아방어기제, 즉 심리적인 안정감이 필요한 것이다.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다. "네가 믿는 대로 될지어다!" 확신(確信)과 미신(迷信)은 어차피 나와 너의 관점 차이 아니겠는가. 나에겐 확신이지만, 너에겐 미신인 것이다. 나는 로맨스이지만, 너는 불륜이라는 명언(?)도 있지 않은가.
이 같은 신비가 느닷없이 그 꺼풀을 벗을 때 사람들은 당혹스럽다. 가면 무도회와 달리 그 모습이 너무나 세속적일 때 더욱 그렇다. 무도회에서 가면을 벗자 멋있는 왕자의 아우라 영롱한 얼굴이 드러날 때 관중은 더욱 열광한다. 그러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의 왕이 황금빛 가면을 벗었을 때 관객은 충격을 받는다. ‘혹시나’ 했는데, 한센씨병(문둥병)으로 일그러진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신비와 가면은 벗지 않았을 때 '상상의 여백'으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벗는 순간, 기대는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더러는 배신감에 치를 떤다. 스스로가 믿어놓고는 상대방을 손가락질한다. 그래야 자아(自我)를 방어할 수 있기 때문일까.
박근혜 대통령의 신비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마주하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았다. "대면 보고가 필요한가요?" 장관은 물론 수석비서관과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 거의 매일 대화 없이 '혼밥'을 먹었다. 간혹 말을 할 때도 길이를 최소화했다. "휴전선은요." "대전은요?" 전여옥 씨는 이를 어린아이들이 쓰는 '베이비 토크'라고 갈파했다. 사실 대중은 이를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했다. 어쩌면 본인은 입을 닫았을 뿐인데, 대중이 스스로 신비로움으로 포장했을 수도 있다.
꽃은 시들고 여자는 늙는다. 대통령도 피할 수 없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은 주름살을 경륜으로 삼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주름살을 극도로 혐오한 듯하다. 주름살 없는 팽팽한 얼굴은 한편으론 경륜을 짐짓 감추는 가면일 수 있다. 일부러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경륜'을 감출 때, 그것은 신비가 아니라 가면일 뿐이다.
신비(神秘)는 경이(驚異)이지만, 가면(假面)은 경멸(輕蔑)로 변하기 쉽다. 광장의 촛불은 신비주의와 가면을 태웠다. 그런데 이 신비주의와 가면은 과연 박근혜 대통령 것일까. 아니면 대중이 씌웠을까. 촛불이 타자(他者)가 아니라 나 스스로를 태울 때 비로소 우리사회의 진실한 민 낯이 드러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광장의 시민들도 진아(眞我)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