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 미스터리' 이름 7개·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재조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최태민에 대해 혹평한 가운데 최태민의 인생사가 눈길을 끌고 있다./TV조선 방송화면 캡처


최태민, 그는 누구?

[더팩트ㅣ박대웅 기자] 김종필 전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의 관계에 대해 의구심을 표현한 가운데 최태민의 그동안 행적이 재조명 받고 있다.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 붙은 호칭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수사자료는 최태민을 승려로 기록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라는 이름은 각종 가명 중 7번째 이름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 출신으로 1942~19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으로 내려온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군으로 자리를 옮긴 최태민은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1951년 군을 떠나 이름을 '봉수'로 바꾼 최태민은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김모 씨와 결혼했지만 김 씨가 최태민을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도피 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최태민은 이름을 '퇴운'으로 바꾸고 1년여 뒤 부산에서 전 부인 임모 씨와 재결합했다.

'월간조선'이 2007년 7월호에서 밝힌 수사자료에 따르면 임 씨는 5번재, 김 씨는 6번째 부인으로 표기돼 있지만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임 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둔다. 1965년 천일창고라는 회사 회장으로 재직하다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최태민은 이 무렵 박근혜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1993년 11월호 '월간중앙'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보도했다. 이 무렵 최태민은 '태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에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근혜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은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등 권력형 비리에 발을 담궜다는 의혹에 휩싸인다. 여기에 온갖 여성과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나섰다.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의 잇따른 보고에 대통령 서재에서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 자리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부장과 백광현 국장 등이 동석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최태민은 10·26 때까지 박근혜 대통령 곁을 지켰다.

10·26 이후 최태민은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받았고,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했다.

최태민은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가던 박근혜 대통령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3년 만인 1986년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서 최태민의 전횡에 항거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최태민에게 보고해야 이사장(박근혜 대통령)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이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 무렵 '어깨동무' 등 당대 인기 어린이 잡지를 편찬하던 기자들과 직원들은 파업과 농성을 이어가며 '외부 세력' 개입 중단을 촉구했다. 여기서 '외부 세력'은 최태민, 최순실 부녀를 말한다는 게 공통된 목소리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 박근령 씨가 이사장을 맡을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최태민 개입설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서 칩거하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bdu@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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