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ㅋㅋ,ㅎㅎ'로 표현하는 디지털 시대에 공자왈 맹자왈에서 출처를 찾아야 하는 어려운 단어들이 난무한다. 아마도 작금에 터져 나오는 사건들이 21세기 민주주의 시대가 아니라 15세기 왕조시대에서나 일어날 법해서 그런 것일까. 모처럼 고사성어에 한자 공부까지 하게 생겼다.
먼저 농단(壟斷)이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최순실 국정농단'이란 표현이 그치지 않는다. 농단은 사전적으로는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은 언덕',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이란 뜻이다. 전자는 한자의 본래 뜻이고 후자는 여기서 유래된 뜻으로 '국정농단'의 쓰임새에 가까울 것 같다. 쉽게 표현하면 '국정을 쥐락펴락한다'는 정도이겠다.
한자가 어려우면, 대개 고문(古文)에서 유래된 용어이기 십상이다. 농단도 마찬가지이다. 농단(壟斷)은 밭두둑 농(壟)에 끊을 단(斷)이다. 한자로만 보면 깎아 세운 듯 높은 언덕이다. 이것이 마음대로 쥐락펴락 전횡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은 맹자왈 때문이다.
맹자의 '공손추 장구'의 원문은 '용단(龍斷)'으로 돼 있지만, 쓰임은 농(壟)이다. 맹자가 제(齊)의 재상자리에서 ‘하야’하자 왕이 심부름꾼을 보내 뜻을 전한다. "도성에 저택과 만 종의 녹을 드리고, 제자를 계속 양성토록 함으로써 대신과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고 싶다." 이에 "물러났으면 그만둘 일이지, 또 그 제자가 대신이 된다면 결국 부귀 속에서 혼자 농단하는 것이다"하고 거절한다.
그런데 심부름꾼도 '농단'을 알아듣지 못하자 맹자가 설명한다. "원래 시장은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교환하는 곳이다. 한 사내가 높은 곳에 올라가 좌우를 살핀 다음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했다. 사람들이 이를 아니꼽게 봐 그에게 세금을 물렸다. 장사치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된 것이 바로 이 사내 때문이다."
즉, 농단이란 전후 좌우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자리인데, 이곳에 올라 시장 상황을 판단한 뒤에 매점매석, 또는 장소에 따른 가격 차이를 이용해 폭리를 취한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이것이 맹자를 거쳐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이익과 권력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비선(秘線)의 국정농단' 역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몰래 숨어 권력과 관계를 맺고 모든 정보를 접하면서 인사와 이익을 챙긴다는 뜻이다. 목하 개명천지의 대한민국, 글로벌 코리아에 선무당들의 한바탕 굿판이 벌어졌던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든 국민은 창피함과 자괴(自愧) 때문일 것이다.
국치민욕(國恥民辱)이다. "이게 나라냐"라고 쓴 팻말까지 나왔다. 전 세계에 발가벗은 국가의 수치(羞恥)와 국민의 욕됨이 다섯 자로 압축된 것이다. 지도자가 이러한 사정을 몰랐다면 '하야', 알았다면 '탄핵'이란 말도 나온다.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한 영와 '더 리더(The Reader)'의 원작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이다. 나치 치하에서 만난 15살 소년과 36살 여인의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문맹인 여주인공을 위해 소년은 책을 읽어주고, 사랑하며, 함께 있는다. 작가는 이러한 둘만의 의식을 통해 역사와 인간, 죄의식, 사랑과 윤리를 통찰한다. 독일어권 문학 최초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고, 각종 문학상과 프랑스 레종되뇌르 훈장도 받았다.
결말은 문맹의 여주인공이 글을 깨우치면서 자신이 모르고 행했던 일마저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몰랐던 것도 죄"란 것이다.
대통령이 몰랐다면 그것도 죄다. 여당이든, 비서실이든 몰랐다면 그것도 죄다. 뒤늦게 법석을 떠는 미디어도 죄다. "친박이라면, 실세라면 몰랐을 수 없다"는 전 여당대표의 말도 나온다. 알았다면 대죄(待罪)해야 할 대죄(大罪)이다. 정작 부끄러워하는 쪽은, 죄의식에 사로잡힌 쪽은 국민이다. 그래서 촛불이 붉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따뜻했던 공직자들은 천자문의 태욕근치(殆辱近恥)라는 가르침을 새겨야 했다. 위태롭고 욕된 일을 하면 부끄러움이 몸에 닥친다는 경계이다. 그런데도 버티다 볼썽사납게 나간다. 후안무치(厚顔無恥)에 파렴치(破廉恥), 나아가 몰염치(沒廉恥)의 ‘끝판 왕’이다. 도대체 부끄러움을 모른다.
천자문을 뗀 어린 아이들이 배우는 소학에도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인간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도리"라고 했다. 예절과 의리, 청렴과 부끄러움을 아는 태도가 기본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공직자로서 청렴과 부끄러움을 내팽개쳐서야 되나.
국정을 농단(壟斷)했던 인사들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했다. 하늘은 곧 국민이다. 국민의 흐름은 곧 역사이다. 국민과 역사 앞에 죄를 지으면 만고천추에 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원래 농단(壟斷)은 용단(龍斷)으로 씌었다. 어찌 보면 용(龍)을 자르는 것이다. 말썽 많은 '미르재단'의 '미르'도 용의 우리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용이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가 됐든, 후자가 됐든 용단(龍斷)의 용단(勇斷)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