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오경희 기자] 두려움에 떠는 세현(배두나 역) 앞에 종이 한 장이 놓인다. 끝없이 흐르는 피눈물을 삼키며 세현은 사인한다. 그리고 이내 오열한다. '터널'에 갇힌 자신의 남편, 정수(하정우 역)를 포기한다는 동의서였다.
최근 개봉한 영화 '터널'은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평범한 가장인 정수가 갑자기 무너진 터널 속에 갇힌 뒤 외로운 생존 과정을 그린다. 정수는 "반드시 구출하겠다"던 정부의 약속을 믿고 암흑 속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돌아온 건 싸늘한 시선과 '외면'이었다.
정부 측은 '경제적 손실'을 앞세워 세현에게 정수의 생존에 치명적인 제2 터널 공사 재개 동의서를 내밀었고, 정수 가족에게 일어난 비극에 함께 아파했던 국민들은 이제 지쳤다고 설득한다. 정수를 구출하기 위해 나섰다 숨진 구조대원의 유가족은 세현에게 "너 때문에 죽었다"고 비난한다.
영화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를 떠올린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수학여행을 떠났던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한 304명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은 정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의 무능이 데자뷔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편했고, 두려웠던 이유는 '망각'이었다. '다수가 피해 볼 수 없다'며 '한 사람(또는 일부)의 존재와 사고는 이제 그만 잊으라'는 정부의 논리가 어느새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든 것은 아닌지 뜨끔했다.
2년 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며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다. 정치권은 유족과 국민 앞에 진상규명을 다짐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여야 대치로 참사 205일 만에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그 기간 동안 19대 국회는 '식물 국회'란 오명을 안았다.
그리고 2016년, '정치권의 수준'은 세월호에 멈춰 있다. 특별법 통과 이후 현재까지 세월호의 진실은 진도 팽목항에 묻혀 있으며, 이를 밝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한 연장 여부를 놓고도 여야가 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세월호뿐만 아니다.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 씨 사건, 국가 안보를 이유로 사드 배치의 공포에 떠는 경북 성주 군민들 등 모두 영화 속 정수와 같이 출구 없는 터널 속을 헤매고 있다.
터널을 뚫어야 할 중요한 몫은 '민의의 정당'인 국회에 있다. 그런데도 '협치'를 내걸며 역대 국회와 차별화를 공언한 20대 국회는 19대 국회의 전철을 밟고 있다. 여야는 최근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안 처리와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청문회 등 쟁점 현안을 놓고 '네 탓' 공방을 거듭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식물 국회'를 재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강희(백윤식 역)는 말한다.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뭐 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을 쓰고 계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고 이죽거린다.
적당히 짖었기 때문일까. 이강희의 말처럼, '윗분'들은 대중의 망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섭다. 지난 7월 "민중은 개돼지"란 발언으로 파면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빙산의 일각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