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리우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은 남자 양궁에서 나왔다. '10-10-10'의 완벽한 과녁으로 단체전을 우승했다. 과연 '주몽(朱蒙)의 후예'라는 찬사가 터져 나온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리를 동이(東夷) 또는 예맥(濊貊)으로 불렀다. 둘 다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동이가 동쪽 오랑캐라면, 예맥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북방 오랑캐를 지칭한다.
오랑캐는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유대인이나 희랍인이나 로마인들이 자신을 제외한 주위 종족을 바바리안(Babarian)으로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중국인이든 유대인이든 희랍인이든 로마인이든 모두가 이민족을 낮잡아 취급하면서도 두려워했다. 아무리 베어내고 짓밟아도 꿋꿋이 자라나는 잡초처럼 생명력이 질기고, 더러는 자신들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유대국가도 아시리아에 무너지고, 끝내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로마는 게르만 이민족에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이민족에 대한 두려움의 대표적인 발로이다.
중국은 자신이 천하의 중심이고, 동서남북을 각각의 오랑캐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들이 붙인 오랑캐의 이름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다. 이들과는 끊임없이 부딪치고 마찰하면서, 때론 복속시키고, 때론 점령당한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특히 우리는 중국에 매우 불편하고 두려운 이민족이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호전적인 종족으로 비쳤다. 동이의 한자 '오랑캐 이(夷)'의 상형은 '큰 활'이다. 이를 파자(破字)하면 큰 대(大)와 활 궁(弓)이다. 농경을 주로 하는 중국인들이 봤을 때 동이는 큰 활을 자유자재로 쓰는 무서운 수렵 종족이었다.
맥국 맥(貊)은 '갖은 돼지 시' 변을 붙이고 있다. 같은 변을 붙인 짐승이름 맥(貘)이나 오랑캐 맥(貉)과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상통한다. 특히 짐승이름 맥(貘)은 표범의 딴 이름이고, 오랑캐 맥(貉)은 담비와 오소리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저돌적인 성향의 거칠고 강인한 종족이란 뜻으로 읽힌다.
이런 종족과 직접 대결은 버거웠다.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두 차례에 걸쳐 침공했지만 을지문덕 장군에 처절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결국, 나라까지 무너져 당(唐)왕조에 넘겨준다. 당(唐)의 태종도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안시성에 막혀 회군하고야 말았다. 결국, 신라를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거대한 만주지역부터 대동강 이북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용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단순히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이 말고도 서융, 남만, 북적이 있지 않은가. 헌데 '이융제융(以戎制戎)' '이만제만(以蠻制蠻)' '이적제적(以狄制狄)'이라고는 왜 하지 않는가.
원래는 당 태종이 "예로부터 '만이(蠻夷)로 만이(蠻夷)를 공략함'이 중국의 형세"라면서 이런 정책을 지속적으로 폈다. 여기에서 '만(蠻)'이 탈락하고 '이(夷)'만 남았다. 서융 남만 북적과 달리 동이족만 끈질기게 버티면서 존속해 왔기 때문일까.
최근 '사드(THAAD)'를 두고 중국과 한국이 서로 대내외 여론전을 펴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정부는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국내 목소리에 대해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에 놀아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지만, 한마디로 듣기 불편하다. 우리가 서로 대립하며 갈등하는, 그래서 적전분열 하는 오랑캐쯤이라고 스스로 비하하는 것 아닌가. 군주정이거나 독재가 아닌 민주국가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은 자칫 전체주의로 흐르기 쉽다.
예컨대 일본의 식민사관이 동인과 서인의 대립을 당파싸움이라고 몰아붙였다.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 군국주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목을 걸고 '아니 되옵니다'라고 외치는, 그리하여 당파의 부침(浮沈)이 계속되는 모습은 현대의 여당과 야당의 모습이 아닌가. 그런 것이 어찌 비난과 비판의 대상인가.
오히려 공론의 장 없이 밀실에서 뚝딱 결정하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비판의 목소리를 '오랑캐 식'이라고 스스로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오랑캐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세계 4대 열강에 둘러싸인 우리의 처지에서는 무엇보다 '이강제강(以强制强)'의 지혜를 짜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균형외교라고 해도 좋다. '줄타기 외교'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대치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동북아에서 어느 한 쪽 진영에 합류하는 것보다 중간지대를 넓게 확보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은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고, 대통령은 '통일대박'이라고 했지만, 정말로 통일을 원한다면 우리가 스스로 양대 세력의 '완충지대' 역할을 자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재의 상태에서 설령 북한이 내부로부터 무너진다고 해도 곧바로 대한민국을 주체로 흡수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는 어쩔 수 없이 '역학관계'가 작용하지 않겠는가.
중국이 북한을 편드는 것은 바로 '완충 역할' 때문일 것이다. 직접 미국과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중간지대 말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빤하다. 거듭 말하지만 '이강제강(以强制强)', 슬기로운 외교정책이 필수적이다.
정치에서 갈등은 질서만큼이나 핵심 요소이다. 갈등과 질서는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며,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등이 없는 정치는 본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억누르고 미봉으로 일관하다가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치르며 해소하게 되는 것이다.
'사드'는 이미 저지른 일이다. 그렇더라도 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미 저질렀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이다. 반대의 목소리야 말로 미국을 향해서나 중국을 향해서 강력한 '카드'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부도 여론에 기대어 행로를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이 우리를 전정 민주주의 국가로 여긴다면, 아무리 강력한 정부라도 여론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사드'를 강행하든, 철회하든 반대여론은 강력한 협상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반대 목소리를 막무가내 억누르려는 것은 슬기롭지도 신중하지도 못하다. 그들에게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정부 마음대로 결정하는 권위주의 국가로 치칠 수 있다.
지금은 '이이제이(이이제이)' 어쩌고 하면서 한 목소리를 강요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현명한 여론을 등에 업고 '이강제강(以强制强)'의 외교를 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