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신진환 기자] 전직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헌정회(憲政會) 내 친목 모임인 '기우회(棋友會)' 소속 원로의원들이 '반상'을 앞에 두고 정치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3시께 국회 헌정회관 2층에 있는 기우회 사무실에 4명의 노인이 있다. 모두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구두를 신은 이들 중 2명은 바둑을 두고 있고, 그 옆에서 구경하고 신문을 보는 이가 각 한 명씩이다.
TV 소리를 뚫고 바둑알이 기판에 내리치는 경쾌한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흑돌과 백돌을 쥔 노신사가 속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한 수를 두기 위해 장고하는데,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얼마나 빠르냐면, 흑과 백이 동시에 두기도 한다. 빠르게 두다 보니 바둑판 괘선의 교차점과 벗어난 곳에 애매하게 돌들이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돌 근처에 수를 둬야 할 땐 개의치 않고 돌을 밀어 넣으며 둔다. 이들은 한차례 '금배지'를 달았던 전직 국회의원이다.
"보통 한 판은 30분 이내로 끝난다"며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A 전 의원이 점잖게 얘기한다. 정해진 룰은 없지만, '낙장불입'이다. A 전 의원이 착수한 뒤 다시 돌을 움직이려 하자 '후배' B 전 의원(13대)은 손을 붙잡으며 "에이~ 안 되지"라며 단호히 말한다.
실제 3시 5분에 시작했던 대국은 약 20분 만에 끝났다. 기우회 간사인 A 전 의원이 B 전 의원을 4.5집 차이로 이겼다. B 전 의원은 1만 원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으며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돈을 딴 사람이 나가서 커피를 사"라며 씩 웃는다. A 전 의원은 "기우회엔 '프로'와 '비프로', 두 부류가 있어. 프로는 내기를 걸고 하고 비프로는 그 반대"라고 설명한다. 무조건 '내기 바둑'을 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10대 국회의원을 지낸 C 전 의원이 자리를 뜬 A 전 의원에게 "컴 온(come on)"을 외치며 도전장을 내민다. 기력이 아마 3~4급 수준이라는 C 전 의원은 좌·우상귀·좌하귀 화점에 흑돌을 얹는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으응~핸디(캡)야 핸디. 내가 기력이 낮으니까"라면서, 대뜸 "이게(바둑) 치매 예방에 좋아"라고 말한다. A 전 의원은 C 전 의원보다 조금 높다고만 밝혔다.
대국이 진행되는 중 TV에서 한 연예인의 성폭행 의혹과 관련한 뉴스가 나왔다. 구경하고 있던 B 전 의원은 "요즘 연예인들 때문에 아주 난리야 난리. 왜, 집 비밀번호를 알려줘서…"라며 흥분한 말투로 말끝을 흐린다. 이어 새누리당 최경환·윤상현 의원의 공천 개입 의혹에 관한 뉴스가 나오자 "아이고…쯧쯧"이라고 혀를 찬다. C 전 의원은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통령한테 누님이라고 하면 되나. 정치를 잘해야 하는데"라고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정치인의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이냐'고 묻자 A 전 의원은 "정치인은 국가와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직해야지. 국회의원이 정직하지 못하다면 국민은 누굴 믿고 신뢰하겠나"고 답한다.
그러던 가운데 이번엔 15분 만에 3점 접바둑이 끝났다. 3.5집 차이로 진 C 전 의원은 "어제는 내가 5연승을 했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네"라고 멋쩍은 웃음을 띠며 지갑을 열었다. 승리욕이 발동했는지 C 전 의원은 재대결을 요구했고, A 전 의원은 이를 받아들인다.
현역 의원과 바둑을 둔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A 전 의원은 "18대 국회 때 현역 의원과 헌정회 기우회의 친선전을 추진했었다. 근데 현역 의원들이 바쁘니까 성사되지는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환영하지 않겠나"라고 기대감을 내비친다. 20대 국회 기우회는 지난 5일 창립총회를 열고 바둑을 통한 협치를 다짐했다. 여기에는 프로기사 9단 조훈현 새누리당 비례대표가 고문을 맡고 있다.
바둑과 정치는 닮은 구석이 있다고 한다. A 전 의원은 "오래 바둑을 둔 사람은 상대방의 기풍을 보면서 성격이나 품성을 알 수 있지. 때로는 권모술수(權謀術數)를 할 때가 있다는 것도 비슷해. 또, 바둑에서 작은집을 살리려다 큰집을 잃는 수가 있거든? 정치도 마찬가지야. 어느 사안이 중요한지를 정확히 잘 판단해서 소탐대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