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쉰 세대'와 '신세대'를 가르는 기준이 여럿 있다. 노래방에서 '뽕짝'을 찾느냐 '랩'을 부르느냐, '고답이'이나 '낄낄빠빠'란 신조어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 점심에 피자나 햄버거를 먹느냐 찌개나 탕을 찾느냐. 간혹 연예인 임수정 씨가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로 시작하는 가요 '연인들의 이야기'를 부른 가수란 사실을 아느냐 여부로 가르기도 한다.
분명하게 세대를 가르는 기준도 있다. 바로 '국민학교' 나왔느냐, '초등학교' 졸업했느냐. 일본의 '황국신민학교' 준말인 국민학교는 20년 전 1996년 3월 1일자로 사라졌다. 이름만 바뀐 게 아니다. 배우는 내용도 사뭇 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토끼와 거북' 우화다.
본디 우화의 가르침은 느린 거북이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날랜 토끼라도 방심하면 실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토끼가 낮잠을 자느냐, 낮잠을 자지 않으면 당연히 이기지 않으냐, 설령 낮잠을 자더라도 빨리 달리면 이길 수 있지 않으냐 하는 의문이다.
이를 반영해 교과서는 승패가 없이 '토끼는 깡총깡총 뛰어갑니다. 거북은 엉금엉금 기어갑니다'로 끝을 맺었다. 소위 '오픈형 결말'이다. 교사는 어느 쪽이 이겼을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질문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자연히 신세대에게 이 우화는 결말도 의미도 다양하게 각인됐다. 거북이 이겼다는 획일적인 기억에 빠져있는 '쉰 세대'와 달리 말이다.
이렇게 자란 신세대는 꿈도 다양하고 현실적이다. 그저 '사'자가 붙은 직업이 최고로 알았던 '쉰 세대'가 아니던가. 그런데 '사'자의 한자는 각각 다르다. 판사 검사는 '일 사(事)'를 붙인다. 관청의 행정 주사도 마찬가지다.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다 변호사가 되면 '선비 사(士)'를 붙인다.
운전사도, 각종 기술사도 모두 '선비 사(士)'이다. 아마도 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니까 그리 붙인 것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사(士)'는 꼿꼿이 선 남성성을 상징한다. 굳이 유추한다면, 남성성이 필요한 업종이나 굴하지 않는 기개가 필요한 분야에 '선비'의 상징 글자를 붙이지 않았을까.
교사는 물론 '스승 사(師)'이다. 의사도 그렇다. 교사는 당연히 선생님으로 부르지만, 의사도 '의사 선생님'으로 부르는 연유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의사'가 아니라 '의생(醫生)'이다. '날 생(生)'을 쓰는 이유는 의술을 다루는 직업이 기본적인 소양만 가지면 되는 것으로 여겼던 전례를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도 과거 소과(小科)에 합격하면 '생원(生員)'으로 불렸다. '생(生)'과 '원(員)'의 동등한 결합이다. 공무원의 바로 그 '원(員)'이다.
달리 보면 생명을 다룬다는 뜻과 중첩적으로 쓰였을 수 있다. 인간의 생사(生死)에 대한 관념은 전통적으로 '하늘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의사가 환자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의사에게 "제발, 살려주세요"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잘못된 믿음, 혹은 과도한 기대일 지도 모른다. 의사는 그저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한때 우리나라의 대표적 아나운서로 오랫동안 '장학퀴즈'를 진행하며 지식인의 표상으로 보여졌던 차인태 씨는 아나운서를 한자로 '언어운사(言語運師)'라고 표현했다. 언어를 전달하는 선생님이라는 함축이다. 방송국 방문객들이 "아나운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차 씨의 업적이다.
외교관인 대사나 영사는 '시킬 사(使)'를 쓴다. 한자 뜻으로는 심부름꾼이나 하인(下人)쯤이다. 국내와 국제적 대우를 생각하면 그저 전갈을 전하는 하인이나 심부름꾼이라 칭하는 것은 너무 낮춰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예부터 사신(使臣)이 맡았던 일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사실, 사신은 경우에 따라 매우 급이 높은 사람이 파견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하급 관리가 보내어지기도 했다. 이 경우는 대체로 '사자(使者)'로 불렸다. 사신이나 사자는 자칫하면 사신(死身)이나 사자(死者)가 될 운명에 처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태종이 태조에게 보냈던 함흥차사(咸興差使)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 '맡을 사(司)'와 '사기 사(史)', '섬길 사(仕)'도 있다. '사(史)'는 뜻과 마찬가지로 역사와 기록을 맡은 사람에게 붙여졌다.
설명이 길었다. 여하튼 '쉰 세대'들은 '사'에 매달렸다. 그것은 출세를 보장하는 동시에 성공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요즘 영어에 능한 '신세대'는 대체로 '-er'이 붙은 직업을 선호한다. 엔터테이너(Entertainer), 프로듀서(Producer), 프로게이머(Pro Gamer), 이런저런 플레이어(Player)처럼 말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인(人)'이나 '가(家)', '자(者)'쯤이다.
그렇더라도 현대 젊은이의 대부분은 '원(員)'을 향해 달리는 것으로 보인다. 무려 24만 명의 청년이 공시생(공무원시험준비생)이라지 않는가. 청년 인구의 40%이다. 여기에 아직도 대기업에 매달린다. 10대 기업 입사시험을 위해 문제집과 스터디그룹이 범람할 정도다. 이들도 합격하면 사원이니 결국 원(員)이다.
결국, '사' 대신 '원'을 향해 달리는 셈인데, 마치 사바나를 배회하는 누 떼나 얼룩말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 같다. 네가 뛰니 나도 뛰고, 모두 뛰니 그저 뛸 뿐인 초원의 영양들처럼 말이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쉰 세대'들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싹쓸이한 들녘에 먹거리(일자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자리의 특성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청년들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후장대(重厚長大)의 대량생산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이제는 직장(職場)이 아니라 직업(職業)이다. 아무리 큰 기업(직장)이라도 앞으로 10년 후를 장담하지 못한다. 평생직장이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직장'을 선택하는 것은 단견일 수 있다. 기업(직장)이 사라져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직업'을 택하는 것이 장기적인 안목일 것이다.
사회는 변하고, 선호하는 직업도 변한다. 지금 인기 있는 직업군이 앞으로도 좋을까. 오히려 비인기 직업군이 각광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곳에 '블루 오션'이 있지 않을까. 구체적인 직업군을 예시하기는 좀 그렇지만, 둘러보면 현재 인기 직업이 과거에는 천대받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고, 멀리 보는 새가 다양한 먹이를 찾는다. 거북이 늘 토끼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요즘 토끼는 졸지 않는다. 졸면 시쳇말로 죽는다.
윌리엄 클라크는 "청년들이여, 대망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고 했지만, 필자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청년들이여, 똑똑하라(Boys, be sm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