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희의 P-STORY] 최경환·윤상현 녹취록 파문과 '박심', 그리고 '민심'

18일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인 최경환·윤상현 의원(왼쪽부터)이 4·13 총선 과정 개입 의혹 파문에 휩싸였다./더팩트DB

[더팩트 | 오경희 기자]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는 '막후 정치'에 능했다. 지난 2009년 2월, 무더기로 발견한 그의 '비밀 편지' 299통은 이를 증명했다. 이 편지들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를 보내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지낸 노론 벽파의 거두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하는 등 측근을 중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막후는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배후'를 뜻한다. 막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진짜 정치'는 장막 뒤에서 이뤄진다는 얘기다. 배후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 뜻(의중)을 잘 아는 '복심'이 그의 입과 눈·귀를 대신한다. 복심 또한 전면에 나서기보다 측근을 내세운다.

지난 18일 불거진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인 최경환·윤상현 의원의 '4·13 총선 과정 개입 의혹' 역시 초점은 배후의 실체다. 최·윤 의원은 총선 당시 경기 화성갑 출마를 선언한 김성회 전 의원에게 출마 지역 변경을 요구하는 압박 전화를 한 것으로 이날 녹취록 공개를 통해 알려졌다. 다음 날 두 의원은 김 전 의원이 친박계 맏형인 서청원 의원과 한 지역구를 두고 공천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을 막고자 한 것이란 주장도 뒤따랐다. 같은 날 친박인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공천 개입설까지 잇따라 터졌다.

서청원 의원은 19일 당 대표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전날 언론을 통해 공개된 최·윤 의원의 녹취록 파문이 직접적 원인이란 해석이다./문병희 기자

두 의원의 발언이 담긴 통화 녹음 내용엔 실제 당사자인 최 의원을 비롯해 서청원 의원과 현 전 정무수석 등 친박계 의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주목할 점은 두 의원이 김 전 의원에게 지역구 출마를 종용하며 "대통령 뜻"이란 발언을 한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계파의 접점인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 '박심(朴心)'이 작용했다는 의미다.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 최·윤 파문의 몸통은 서청원 의원이고, 배후는 '박심'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공천에 직접 개입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박심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새누리당은 차기 지도부 경선 때마다 경쟁자들 간 신경전이 벌어졌고, 지난 6·4 지방선거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대표적으로 서울시장 경선 당시 예비후보로 나선 김황식 전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출마 권유를 받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당내 계파 간 논란이 일자 "박심은 없었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도 친박계가 주도한 '진박(진짜 박근혜 사람) 후보 마케팅'이 도마에 올랐고, '공천 파동' 과정에서 '보이는 손'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며 '보이지 않는 손'은 박 대통령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정치권 일각에서 최·윤 파문의 몸통은 서청원 의원이고, 배후는 박심(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임영무 기자

그러나 민심의 선택은 '박심'과 달랐다. 친박계가 장악한 새누리당은 지난 총선에서 참패했다. 이후 '친박' 대 '비박' 간 계파 갈등 끝에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며 심기일전을 각오했으나, 친박계의 '공천 개입 의혹'으로 또다시 수렁에 빠진 형국이다. 친박계로부터 오는 8·9 전당대회 당 대표 출마를 요구받은 서청원 의원은 이번 파문이 일자마자 19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정체된 권력', '견제 없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말이다. 진위를 알 수 없으나, '박심' 논란 역시 5년간 권력이 한 사람에 집중된 데 따른 병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최근 정치권에서 불붙은 개헌 논의도 '헬조선'의 근본 원인으로 '황제적 대통령제'를 지목한다. 총선 이후 '민의(민심)'를 받들겠다던 대통령의 의중을 '복심'들이 잘못 이행한 것은 아닌지, 자못 씁쓸하다.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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