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모든 것이 '기승전검(檢)'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그렇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명령한 정당 간 세력 균형도 검찰의 선거법 수사에 따라 기울어질 수 있다. 대기업의 지배구조도 수사의 방향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뿐이랴. 미풍양속을 가늠하는 저울과 잣대까지 검찰 손에 있다. 그래서 '기승전검'이다.
예전에 검찰은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불렸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끔찍한 모든 사건들의 종착지가 검찰이란 점에서다.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하는 법정에 세울 것이냐 여부, 즉 기소여부를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하수종말처리장'이 언제부터인지 시민의 생명선인 '상수원'까지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상수(上水)에서 하수(下水)까지 일괄 관리하는 상황이다.
우선 '검찰권'의 정의(定義)부터 포괄적이다. '기관이나 단체 및 국민이 국가의 법을 바로 집행하는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의 권한'이다. 결국 해석하기에 따라, 또는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전 국민이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다. 이 무시무시한 검찰권에는 마땅히 기미(羈縻)가 채워져야 한다. 굴레와 고삐이자, 견제와 제어장치 말이다.
그런데 현재의 검찰은 목줄은 채워져 있으나, 그 줄을 자신이 잡고 있는 형국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란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얼핏 보면 목줄이 채워져 있는 것처럼, 견제를 받는 것처럼 짐짓 행세할 뿐이다.
다산 정약용이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말했다. "사람이 천권(天權)을 대신하면서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세히 헤아리지도 않은 채 살릴 사람은 죽이고, 죽여야 할 사람은 살린다. 그러고도 태연하고 편안할 뿐만 아니라 돈에 흐려지고 여자에 미혹돼 있다. 비참한 백성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어도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갈수록 깊어진다"고 했다.
다산의 일갈은 당시의 형옥(刑獄)을 개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21세기 대한민국의 실상을 내다본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잘못된 재판으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숱한 인사들에 대해 뒤늦게 무죄가 확정된다. 그런가 하면 '유전무죄의 법칙'에 따라 무수한 재벌들이 사면 복권되고, 툭하면 형 집행정지로 병원에서 생활하기 일쑤다.
얼마 전 필자가 잘 아는 전직 관료를 만났다. 그는 자치단체장 시절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구속이 됐다. 항소심과 대법원을 거쳐 무죄가 확정됐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구속기간에 따른 쥐꼬리 보상금이 전부였다. 대신 잃은 것은 명예와 인생이었다.
존경 받던 공직자에서 추한 공직자로 이미지가 구겨졌지만,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무죄가 난 것을 모른다. 그저 미디어에 장식된 수갑 이미지만 기억할 뿐이다. 목민관으로서의 포부도 당연히 모래성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렇게 한 공직자가 무너졌지만,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여전히 잘 나간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이 개탄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려야 할 사람, 아니 무고한 공직자를 정치적 인격적으로 살인하고도 '태연하고 편안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검찰권을 잘못 행사해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으면, 담당 검찰도 최소한 그만큼의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봤듯이, 검찰은 무죄가 나도 승승장구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분명 유죄인데, 법원이 잘못 판단한 것 같다. 그럼에도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슬며시 숨어버린다. 하자(瑕疵)와 흠결(欠缺)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가 아닌가. 그 말이 맞으면, 한 검사의 잘못도 전체 검사의 흉허물이 되는 것 아니겠나.
이 검사동일체야 말로 '끼리끼리'의 전형처럼 들린다. 현직이든 전직이든 마찬가지이다. 현직도 곧 전직이 되는 것이다. 설령 신출내기가 어줍잖게 의협심을 보여도 이내 '왕따'의 사회학에 두 손을 든다. 그래서 홍만표 변호사(전 대검중수부 수사기획관)의 '전관비리'도, 어마어마한 수임료 챙기기와 부동산 투기도 뉴스로 뉴스를 덮으며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롯데그룹 수사가 시작되자 대형 로펌의 '전관 변호사'들이 "젊은 친구들이 일 좀 하는군"하며 반색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렇잖아도 수입이 신통치 않던 차에 재벌과 관련된 사건은 돈이 쏠쏠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서울남부지검의 한 검사가 자살한 것도 '검사동일체'에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그것은 조금 다른 측면이다. 직장에서 질 나쁜 상사가 어디 검찰에만 있겠나. 시쳇말로 검사는 사표 던지면 변호사라도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사표를 품에 넣고 다니는 일반 회사 직원들은 저녁 퇴근길에 소주잔 기울이며 오징어 대신 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들이라고 자존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무소불위의 검찰이 문제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수사권 독립도, 공직비리수사처 신설도 이루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은 자신의 '수호천사(?)'인 검찰 권력을 굳이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와대에 검찰 출신을 앉혀 이를 통해 검찰권을 활용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청와대가 간과한 것이 있다. 권력은 불과 5년이지만, 현직과 전직까지 포함한 '검사동일체'는 훨씬 오래 가는(혹은 갈) 것이다. 그래서 검찰은 반환점을 돌아버린 청와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전관비리의 근절도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이다. 박 대통령은 몰라도, 그 아래 비서관과 행정관들은 서서히 검찰의 발톱을 느끼고 있을 시점이다. 자신들이 검찰의 목줄을 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목줄을 검찰이 쥐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검찰 출신은 국회도, 대기업도 '점령'한 상황이다.
최근 새누리당에 복당한 유승민 의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1조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국체의 정의이다. 뒤집어 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는 것이다. 유 의원의 뜻은 알겠는데, 헌법 1조1항만 아니라 바로 뒤이어 1조2항의 지엄한 가치도 지켜줬으면 한다.
헌법 제1조2항은 이렇게 돼 있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정의돼 있는데, 현실은 과연 그런가. 사실상 '기승전검(檢)', 검찰이 무소불위의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 아닌가. 기소독점에서 출발해 권력독점을 지향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는 스포츠카의 대명사이다. 최고 속도와 순간 가속력에 사활을 건다. 가장 중요한 부품이 바로 '브레이크'이다. 최고 속도는 최고의 브레이크 성능에 달린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속도의 종착점은 충돌과 죽음이다. '최고의 검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