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색다른 인문학] 브렉시트 충격파 해법, '경제 평형수'를 살펴라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으로 수출주도형 국내 경제에도 곧바로 충격파가 전해졌다. 환율이 요동치고, 주가지수가 급락했다. /더팩트DB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가 희곡 햄릿에서 읊조린 명대사이다. 지난주 영국은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다. "떠나느냐, 남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leave, or not to leave, that is the question)!"

햄릿과 달리 현대의 영국인은 다수결로 '떠남(Leave)'을 선택했다. 소위 '브랙시트(Brexit)'이다. 다수결의 장점은 '집단지성'의 가능성이지만, 단점은 '군중심리'의 경향성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이 경고했었다. "가슴으로 투표하면, 나중에 머리가 후회할 것!"이라고.

동전은 던져졌고, 결과는 나왔다. 세계가 기대했던 앞면이 아니라, 우려했던 뒷면이다. 그 여파로 세계 증시에서 하루 사이에 2조5000억 달러가 사라졌다. 글로벌 경제가 패닉에 빠진 것이다.

수출주도형 우리 경제에도 곧바로 충격파가 전해졌다. 환율이 요동치고, 주가지수가 급락했다. 당장 영국계 자금 36조4770억 원의 향배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한꺼번에 이탈하면, 여기에 '군중심리'까지 더해지면 치명적인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그렇잖아도 한국 경제의 발목에는 쇠사슬이 매여 있는 형국인데, 여기에 쇳덩어리 하나 더 올려놓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도 있지 않은가. 오른쪽으로 쏠린 추는 필경 왼쪽으로 돌아오기 마련이고,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멀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파도가 일면 배도 롤링과 피칭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복원력이다. 배가 기울어도 복원력을 상실하지 않으면,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세월호의 침몰도 결국은 복원력 상실이 아니었던가.

배의 복원력은 화물의 총량, 즉 과적(過積)의 문제만이 아니다. 화물의 배치와 고박이 관건이다. 중량이 한쪽에 쏠려 있거나, 적절하게 배치했더라도 제대로 결박하지 않으면 무게중심이 흔들리면서 복원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침몰이다.

과연 우리 경제에는 평형수가 제대로 채워져 있는가 문제이다. 우리나라 수준은 과연 어떤가. 혹시 무게중심이 상대적으로 위쪽으로 쏠리고, 화물이 한쪽에 쌓이고, 그것도 제대로 고박하지도 않고, 평형수도 규정의 4분의 1만 채운 세월호쯤이 아닐지 걱정이다. 사진은 세월호 수색 당시 현장. /더팩트DB

한국경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과연 부(富)가 골고루 잘 배치돼 있는가. 혹시 빈부격차가 너무 심한 상태에서 간신히 무게중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자칫 높은 파고에 배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그나마 유지하던 자세가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 즉, 복원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는 ‘평형수’의 변수도 있다. 평형수는 배의 무게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아랫부분에 채워 넣는 바닷물이다. 제대로 채우면 화물의 배치에 조금 문제가 있더라도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평형수는 배를 무겁게 해 연료소모량이 더 늘어난다. 세월호 비극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덜 채운 평형수도 그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났다. 기름 좀 아끼려다 무게중심을 잃은 것이다.

과연 우리 경제에는 평형수가 제대로 채워져 있는가 문제이다. 바로 사회 안전망이고, 보편적 복지 수준이다. 이런 부분이 제대로 돼 있으면 비록 높은 파도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불어도 경제라는 배는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 수준은 과연 어떤가. 혹시 무게중심이 상대적으로 위쪽으로 쏠리고, 화물이 한쪽에 쌓이고, 그것도 제대로 고박하지도 않고, 평형수도 규정의 4분의 1만 채운 세월호쯤이 아닐지 걱정이다.

이 정부가 열심히 홍보하는 것이 ‘창조경제’이다. 혹자는 알 수 없는 것 세 가지로 안철수의 새 정치, 박근혜의 창조경제, 김정일의 속마음을 든다. 아마도 모두가 손에 잡히지 않고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창조'는 원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모호한 과정을 거쳐 결과로서 비로소 보여지는 것이다. '창조'라는 목표가 세워졌다면, 여기에서 더는 창조성을 기대할 수 없다.

'생각의 탄생'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놀이에는 분명한 목적이나 동기가 없다. 성패를 따지지 않으며, 결과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의무적으로 수행할 과제도 아니다. 이는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느낌과 정서와 직관과 쾌락을 선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창조적인 통찰이 나온다."

양자전기역학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은 "내가 하려는 일이 핵물리학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일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느냐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가 전자의 운동 궤도를 규격화한 것도 시작은 일상 속에서 특별한 흥미였다.

어느 날 식당에서 한 학생이 접시를 위로 던지는 것을 목도했다. 공중으로 던져진 접시는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파인만은 접시에 새겨진 코넬 대학의 붉은 상징에 눈이 갔다. 상하좌우로 도는 붉은 상징을 보면서 접시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했고, 재미 삼아 접시의 흔들림에 대한 방정식을 만들었다. 이는 나중에 전자의 궤도를 유추해내는 발판이 됐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은 미생물을 가지고 그저 놀았다. 무슨 뚜렷한 목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상황을 두고 관찰하면서 그 변화를 즐겼다. 인류 최초의 항생제의 재료가 됐던 푸른곰팡이가 어떤 것인지, 발견 당시에 플레밍은 몰랐다.

그런 것이다. '창조'를 목표로 하면 이미 '창조'는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창조경제'는 '창조'란 말이 붙은 순간, 또 이를 목표로 하는 순간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 문제는 기본이다. 위정자는 백성을 이해해야 한다. 백성을 이해하려면 백성의 생각을 깊이 읽어야 한다. 자신이 늘 지배계급이었던 사람은 피지배계급의 생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이를 알려면 백성에 감정이입이 필요하다. 진정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하는 것이다.

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늘 단순한 법이다. 상대성 원리도 E=mc²으로 간단하게 표시되지 않던가. 소동파는 말했다. 대나무를 그리려면 먼저 내 안에서 대나무가 자라나게 해야 한다고.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말은 갈증이 나면 끌고 가지 않아도 물로 간다고.

지금 우리 경제는 집채보다 높은 파도를 직면하고 있다.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배가 기울어도 복원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화물이 잘 배치돼 있는지, 단단히 결박돼 있는지, 평형수는 제대로 채워져 있는지 점검할 일이다. 이미 과적이라면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비상시일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몇몇 재벌에 집중된 부(富)의 재배치, 빈부격차의 적정선 해소, 복지를 통한 성장, 사회 안전망 확충 같은 '무게중심 바로잡기'로 복원력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세월호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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