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명재곤 기자]반기문 유엔 사무총장(72)의 이른바 ‘제주 발언’을 계기로 정치권이 가히 ‘대선 빅뱅(Big Bang)’초기국면에 들어선 듯한 모습이다. 반 총장의 ‘작심성’언행은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5월의 정치권을 후끈하게 달궜다. 대체로 후보궁핍에 시달리는 여권은 기대감을, 잠룡할거로 경쟁이 치열한 야권은 경계심을 펼쳤다.
유엔 사무총장 신분으로는 사실상 마지막 고국 방문에 나선 반 총장은 25일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의미 심장한’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언론은 반 총장의 내년 대선출마를 기정사실화했다.
“국가통합은 정치지도자들의 뜻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가능하다. 국가통합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년 1월1일에 저는 한국 사람이 되니까 한국 국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는 그때 가서 고민, 결심하겠다.” “미국 대통령 후보들 중에 민주당은 70세, 76세 이렇다. 1년에 하루도 아파서 결근하거나 감기에 걸려 쉰 적도 없다. 체력같은 건 요즘은 별 문제가 안 된다. 특히 한국 같은 선진사회에서는 그렇다.” 반 총장의 간담회 주요 발언이다.
정치에 문외한이라도 이 발언을 ‘대한민국은 국가통합을 위한 정치지도자가 필요하고, 대통령에게 체력만 뒷받침되면 나이는 문제가 없고, 내년 1월1일 귀국후 나는 대선출마 의지를 피력하겠다’고 해석하지 않을까 싶다.
긴가민가하던 반 총장의 대권도전 의지가 확인됐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동안 정치권 안팎에서는 반기문 총장의 내년 국내 행보를 두고 ‘반반(半半)’의 자기 소망적 예측과 주장이 횡행했다. ‘대선 출마를 할 것이다, 않을 것이다.’ ‘여당 인사이다, 야당 인사이다.’ ‘친박 후보다, 아니다.’
여야 정당에 따라, 계파에 따라, 심지어 정당-계파가 같더라도 친소관계에 따라 개개인 정치인들도 반 총장에 대한 ‘반반’평가를 늘어놨다. 하지만 이젠 ‘반반’평가는 사라지고 반기문 반대인 '반반(反潘)' 목소리가 커지고 이에 재단설립등 ‘반기문의 반격’인 ‘반반(潘反)’프로그램이 관심사가 될 듯하다.
반 총장은 여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고 싶은 권력의지가 강하다는 걸 확인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임기가 남아있는 유엔 사무총장이 대권 출마 시사 발언을 하는 게 적절하지 못하다.”(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 “한국인 최초의 유엔사무총장으로 남는 것이 본인이나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더불어민주당 안민석 의원) 야권 진영은 당장 반 총장을 실체적인 대선 경쟁자로 규정짓고 슬슬 공격에 나서고 있다.
이제 반 총장이 대선의 상수(常數)로 등장하면서 정치권의 두뇌게임이 한층 복잡해진 가운데 필자는 같은 맥락에서 반 총장의 관훈클럽 ‘제주발언’을 환영하는 입장이다.
반기문 총창 개인에 대한 이해도나 선호여부를 떠나 그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대선구도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반 총장의 별명중 많이 알려진 게 ‘기름장어’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시절 기자들의 까다롭고 집요한 질문을 기분 나쁘지 않게 응대하면서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간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유연하고 신중한 대인관계를 중요시하는 외교관의 자질이 은연중에 몸에 배인 결과물로 주위에서는 본다. 혹자는 민감한 질문을 회피하는 자기 보신주의 성격탓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외교가에서는 위기상황을 표시내지 않고 잘 벗어나는 으뜸의 처세술이라고 호평하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반 총장은 ‘기름장어’언행으로 소모적 논쟁을 야기하며 자의든 타의든 국민들도 피곤하게 했다.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선두자리를 지킬 때 그는 대선에 관심 없다는 듯이 여론조사에서 자신을 제외시켜달라고 하는등 ‘요리조리’비켜갔다.
그런데 이번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반 총장은 ‘기름장어’에서 최소한 ‘기름’만큼은 뺀듯해 보인다. 그의 현 위치상 단정적인 직설화법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제주발언’을 들은 이들은 ‘반기문 대망론’의 불을 그 스스로 지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심정을 99%밝혔다고 필자는 본다. 이 정도면 대권가도 출정을 반대해온 '가족'들도 반 총장의 뜻을 존중하지 않을까 어림짐작된다.
반 총장의 제주발언은 내년 대선정국의 후보를 가늠하게 하는 단초이고 그래서 철저히 그를 포함해 유력 후보들을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필자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 총장은 26일 원희룡 제주지사 초청오찬에서 ‘관훈클럽’발언이 자기의 뜻보다 많이 앞서갔다며 대선 출마 시사라는 진단에 거리를 뒀지만 이미 그는 대선후보 검증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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