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인생도 바둑도 일수불퇴(一手不退)다. 한번 두면 끝이다. 물릴 수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이기든 지든 한 판이다. 그런데 정치는 선거 때마다 판이 벌어진다. 이겼다가도 지고, 졌다가도 이긴다. 한 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통해 권토중래(捲土重來)가 가능하다.
바야흐로 20대 총선 바둑판이 펼쳐졌다. 여야가 1대1로 맞붙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보면 어쨌든 여(與)와 야(野)의 대결이다. 차제에 바둑 격언으로 작금 정치 판세를 읽어보자.
먼저 기자절야(碁者絶也)다. 바둑은 끊는데 길이 있다는 뜻이다. 끊음으로써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이길 수 없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조화 속에서 그저 잇기만 하면 필경 지고 만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이다. 처지가 궁하면 뭔가 변화를 구해야 통하는 것이다. 더 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필리버스터 정국을 끊고, 국민의당에 통합을 제안하면서 판세에 변화가 일고 있다.
마치 조자룡 헌 칼 쓰듯 거침이 없는데, 신물경속(愼勿輕速)이라 했다. 몰론 깊은 '수(手) 읽기' 끝에 착점(着點)한 것이겠지만, 경적필패(輕敵必敗)다. 안철수가 어리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것이 노년의 함정이다.
어찌 보면 안철수 대표는 '소탐대실(小貪大失)'에 땅을 치고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소속 국회의원을 20명으로 늘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당하게 원내대표를 두고 정국의 균형자를 자처할 수 있으리란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리지 않고 받았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한때 상수(常數)였으나, 지금은 변수(變數)로 전락했다. 이 변수도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역시 사소취대(捨小取大)이다. 대통령이 꿈이었다면, 국회의원 몇몇쯤은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했다. 남의 집이 커 보였을 것이다. 윤여준 씨 말대로 김종인 카드는 '신의 한 수(手)'였다. 붕괴 직전의 더 민주당이 기사회생(起死回生)했다. 침몰 전 탈당사태가 예상됐지만, 그래서 자연스럽게 국민의당이 제2당이 될 수 있었지만, 그 한 수에 물거품이 된 것 아닌가. 더 민주당 세력이 예상보다 커 보인 게 거듭된 실착(失着)을 유발했을 것이다.
상대의 급소가 나의 급소이다. 거꾸로 내가 아픈 곳은 상대도 아픈 것이다. '야권통합'론이 그렇게 아팠다면, 먼저 제의할 수도 있었다.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 했다. 돌 몇 개 포기하더라도 선수를 차지하라는 것이다. '선빵'이 최고다. 안철수 본인 스스로도 정치판에 뛰어든 이유로 '새누리당의 확장 반대'를 들지 않았나. 이를 내세워 수도권에서 전략적 연대를 먼저 치고 나갈 수도 있었다.
붙이면 젖히고, 젖히면 끊어라 했다. 비록 '선빵'을 날릴 기회는 놓쳤더라도 상대가 붙여오면 곧바로 젖혀가야 했다. 실기(失機)하니 비세(非勢)에 몰렸다. 봉위수기(逢危須棄)라 했다. 위험하다 싶으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죽은 자식 거시기를 만져봐야 헛일이다. 죽으려 하면 살 수 있다고 본인도 말하지 않았나.
새누리당은 '꽃놀이 패(覇)'를 즐겼다. 야당이 분열하면 물구나무를 서도 국회 다수당이 된다. 3당체제면 그야말로 죽을 쑤어도 개한테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선작오십가자 필패(先作五十家者 必敗)'란 격언이 어른거린다. 반쯤 먹고 들어간 판이다 보니 내홍(內訌)이 만만찮다. 외우(外憂)가 없으니 내환(內患)인 것이다.
최고의 위기는 심란(心亂)에서 온다. 위기십결(圍棋十訣)의 첫 번째 비결이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승리를 탐하면 결코 이기지 못한다는 경구이다. 마음을 비울 때라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고, 과연 몇 집이나 이길 것인가 김칫국부터 마시는 모양새이다.
골프는 장갑을 벗어봐야, 바둑은 마지막 수가 두어져야 승부를 알 수 있다. 정치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쪼개진 야당은 어떻게든 연대를 모색할 것이다. 세고취화(勢孤取和)이다. 상대의 세력에 갇혀 있으면 신속하게 안정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더불어 피강자보(彼强自保)다. 상대가 강하면 자신의 약점을 돌아보며 두텁게 응수해야 한다. 이는 더 민주당에도, 국민의당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인생바둑과 달리 정치바둑은 다음 판이 있다지만, 그럼에도 한 판 한 판 최선을 다할 때 다음 판이 있는 것이다. 다음 판을 보겠다며 지금 당면한 판을 뒤집는다면, 절대 다음 판을 벌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바둑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은 세기의 바둑 대결 때문이다. 바로 인공지능(AI)과 인간지능의 대결, 구글의 알파고(AlphaGo)와 프로기사 이세돌 국수가 9일 맞붙는다. 다섯 차례 대국이 벌어지는데, 전망은 반반이다.
이 국수가 이긴다는 쪽은 알파고가 비록 유럽챔피언 판후이(2단)를 이겼지만, 내용을 보면 프로 5단쯤 실력이라는 것이다. 입신(入神)의 경지인 9단에게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알파고가 수십만 장의 기보(碁譜)를 담고, 한 달에 100만번의 대국을 소화한다지만, 바둑의 수는 10의 800승을 넘기 때문에 '수퍼컴'으로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바둑의 이치를 벗어난, 책에 없는 신수(新手)에는 알파고도 속수무책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경우의 수가 줄어드는 중반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강할 수 있지만,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한 초반 포석에서는 아무래도 인간이 강하지 않겠느냐는 진단이다.
반대로 알파고의 승리를 점치는 쪽은 '느낌'이 없음을 내세운다. 흥분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강점인 '감성'이 때론 인간 최대의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딥 러닝(Deep Learning)'을 통한 강화학습 프로그램으로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4대 1, 이세돌이 우세할 것으로 본다. 사실 5대 0이라야 하겠지만, '멋쟁이'인 이 국수는 컴퓨터가 당황할 '꼼수'를 절대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4대 1이라도 인간이 진 셈으로 본다. 에베레스트를 4전5기로 정복한 경우 실패했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알파고는 단 한 차례만 이겨도 인간을 정복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인공지능(AI)과 관련한 영화는 많다. 대부분 기계가 인간을 압도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로 그려지는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열연한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컴퓨터가 인간을 제거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벌어지는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줄거리다. 4편까지 나왔지만, 승부는 늘 인간 쪽으로 기울었다. 아직까지 인공지능보다 인간지능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인간이 만들었으니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짙게 밴 것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므로 인간은 신을 능가할 수 없다는 일종의 원초적 패배주의의 반대 현상 말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해 펼쳐질 디스토피아에 대한 무의식적 방어기제 때문일 수도 있겠다.
혹자는 '느낌'의 유무를 든다. 기계인 컴퓨터는 논리적이지만, 인간은 논리를 뛰어넘는 '감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작용뿐인 컴퓨터에는 '감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기계가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때에 따라 초정밀 계측기구보다 더 정확히 잰다. 이른바 '깻잎 한 장 차이'를 줄자나 게이지로는 측정하지 못하지만, 느낌으로는 확실하게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역시 '느낌'이 승부를 가를 것 같다. 하지만 정치바둑은 '중앙'에 승부가 갈릴 것 같다. 바둑 속담에 좌우(左右) 동형이면 중앙에 급소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