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ㅣ 상계동=이철영 기자] 이준석(32, 서울 노원병 예비후보) 새누리당 전 비대위원은 나름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이름과 얼굴을 알린 ‘종편스타’ 중 한 명이다. 본인은 ‘종편스타’라는 말을 부인하겠지만, 지금의 인지도를 가지는 데 종편의 덕이 큰 건 사실이다.
이 전 위원은 28세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정치에 입문, 종편에서 꽃을 피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에서는 하버드대학교를 나온 수재답게 영민한 모습을 보였고, 정치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분석과 촌철살인의 논평을 내놓기도 했다.
나름 종편에서 성공한 이 전 위원은 지난달 24일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노원병에 출사표를 던졌다. 젊은이답게 그리고 방송물을 먹은 사람답게 그의 출마 기자회견은 화제가 됐다.
"중랑천을 타고 올라가다 보니 제 고향에 불곰이 한 마리가 있는 것 같다. 지역 주민들은 그 곰이 상계동 곰인지, 호남지역에 관심 있는 곰인지 아니면 다른 곰과의 다툼에 관심이 있는 곰인지 상당히 의아해하고 있다. 실제로 상계동에서 이 곰이 보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온 연어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고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한다. 여야의 대결이 아닌 고향으로 돌아온 후보와 보궐선거에서 연고도 없이 빈자리를 찾아왔던 후보의 대결이다."
지난달 29일 늦은 오후 취재진과 이 전 위원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역사무소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 전 위원과의 대화는 이상형부터 존경하는 대통령까지 다양했다.
◆"강남이 '형, 대통령 되는거야'라고 물었다"
-이 전 위원은 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 많은 방송에 출연했다. 방송 출연에 힘입어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을 것 같다.
(한참을 뜸 들이다) 같이 방송한 사람들은 걸그룹보다는 20대 중반 여성이 많았다. 비슷한 나이 아니면 위였다. 음...저를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웃음) 나는 방송을 하면서 출연료 협상이나 방송 분량을 놓고 다투지 않았다. 방송이라는 것이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가. 고민 있으면 이야기도 해주고 그렇다 보니 (여성 출연자들이) 한마디 한마디가 고마웠나 보다.
출마 선언을 하는 날 옷, 머리 등등 신경 써주더라. 촬영장을 떠나있다 보니 뭐라고 할까요. 아, 재미있는 외유를 했구나 싶다.
-방송을 많이 해서 친한 연예인도 많을 것 같다. 어떤가. 걸그룹은 좋아하나.
강남은 진짜 웃긴다. 강남은 저를 부를 때 “하버드 형이다”라고 하는데 최근에 선거에 나간다고 하니까 “선거가 좋은 거야?”라고 묻더니 “형, 이제 대통령 되는 거야”라고 한다. 강남은 진짜 순수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에 함께 출연했던 친구들과는 아직도 단체 카톡방에서 이야기한다.
홍석천 형은 본인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을 대해야 되는지를 잘 보여준 사람이고, 공형진 형도 사람이 진짜 좋다. 내 뇌세포는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이후 정지했다. (웃음)
-하버드를 졸업했고, 방송을 통해 이름도 알렸다. 그래서 그런지 눈이 높을 것 같다. 이상형은?
눈이 높다기보다는 제가 좀…. 여러 측면에서 무심한 편이다. 그것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다. 좋아하는 거 하나에 꽂히면 나머지 일들에 대해 무신경하다. 그래서 사람을 힘들게 하더라. 이제는 상계동에 터를 잡았으니 상계동에서 같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아버지는 저보다 4년 빨랐다. (웃음)
◆내 어릴 적 꿈은 ‘지하철 기관사’
-선거를 치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력이 중요하다. 평소 몸 관리는 어떻게 하나.
사는 게 강행군이어서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는다. (웃음) 운동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하는 게 지하철 타고 뛰어다닌 것이다. 지난해 대중교통 비용만 110만 원이 나왔다. 특히 9호선을 많이 탔다. 정말 뛰고, 또 뛰었다. 저절로 운동이 된다.
-연어처럼 다시 상계동으로 20년 만에 돌아왔다.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어릴 때 이 동네에서 외식은 집 앞에 숯불갈비, 피자, 햄버거 등이 전부였다. 외식은 언제나 세 가지 음식의 순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큰어머니가 압구정동에서 M사의 햄버거를 사다 준 적이 있다. 정말 놀라운 맛이었다.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육열이 매우 높아) 동네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가르쳤다. 피아노도 그때 배웠다. (당시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던 집의 아들은 현재 이 전 위원 선거사무소에서 일을 돕고 있다.)
지금은 4호선 당고개역이 있지만, 그때는 상계역이 종착역이었다. 종착역이다 보니 아침에 제복 입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봤다. 그 모습을 많이 봐서인지 꿈이 ‘지하철 기관사’였다. 아직도 동호회에 이름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지하철을 보면 기분이 좋다.
-정치도 사회생활 일부다. 사회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또 ‘술’이다. 주량은 어떻게 되나.
열심히 먹는다. 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진다. 그래도 열심히 마신다. 주량은 모른다. 정신력으로 버틴다. 저는 술자리에서 허언을 안 한다. 문제는 술자리에서 잠이 드느냐, 그렇지 않으냐이다.
-하버드를 졸업했다. 같은 또래에서 봤을 때 별로 고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 어떤가.
시급 10불짜리 아르바이트(알바)를 했다. 시급 10불은 미국에서도 높지 않은 수준이다. 하루 8시간씩 일을 했다. 유학생들 대부분은 집에서 카드 하나씩 들고 온다. 나 역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긴 싫더라. 집안 분위기가 워낙 엄해서 독립의지가 강했다.
유학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한국에 올 때 1500~1600불을 주면 뉴욕에서 인천으로 오는 대한항공을 탈 수 있는데 하지만 난 늘 특가(특별할인가)를 타고 왔다. 그 비행기에는 늘 나 혼자(유학생 중)였다. 늘 최저가만 탔다. 물론 내가 이렇게 생활했던 것은 절대 빈곤의 문제는 아니다. 상대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내에도 ‘오바마 形(형)’ 대통령 나왔으면
-공부도 잘해 세계적 명문인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다른 일을 해도 잘했을 것 같은데 왜, 정치하겠다고 생각했나.
교육봉사(배움을 나누는 사람들)를 하면서 2011년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내 주변에서 일이 발생했다. 불이 나면 119에 신고하라고 가르친다. 교육봉사를 하는 제자 중 한 명이 가정폭력을 당했다.
학생을 보호시설로 보냈다. 방관하는 다수보다 보호시설에 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제자가 제게 ‘엄마가 아니라 이젠 동급생에게 맞아요’라고 하더라. 사회안전망이 어떻게 됐나 싶었다.
2011년 12월 27일 정치에 뛰어들었을 당시 많은 기자가 ‘왜, 비대위에 오게 됐느냐’고 물었다. 제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회안전망 문제를 이야기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저에게는 다급하고 짜증 나는 문제였는데 공감대 형성이 안 되더라. 그냥 있으면 고치고 싶은 사회문제에 대한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경험으로 교육과 저소득층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다.
-이 전 위원과 인연이 깊은 두 분이 더불어민주당에 있다. 김종인 선대위원장과 이철희 소장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필생의 업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당에서) 안 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주저하지 않고 떠난다. (더 민주 참여를 보고는) 마지막 도전을 하려고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마지막 도전으로 경제민주화라는 좋은 정책들을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김 위원장에게 많이 배웠다. 정책과 정치적인 것을 많이 배웠다. 틀을 깨는 답변을 많이 했다. 식사자리에서 출산율, 노동인구를 늘리는 정책을 이야기하면 기본적으로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이야기한다. 김 위원장은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김무성 대표의 조선족 맥락과는 다르다.
김 위원장과 당이 다를 뿐이지 노선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철희 소장과는 예전에 목동에 경쟁자로 출마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도 같이 목동에 출마했으면 계속 방송했을 것이다. 이 소장이 사람들을 잘 챙기는 데 표현방식이 좀 까칠하다. 그래서 제가 ‘선거에서도 까칠해서 어떡해요’라고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본인도 잘 알고 있다.
-혹시 존경하는 대통령이나 리더는 있나.
저는 시대에 맞는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 국민이 선택했다고 본다. 아직 우리나라에 나오지 않은 유형 중에서 오바마 같은 유형을 보고 싶다. 굳이 따지자면 고 노무현 대통령이 오바마와 가장 가까운 분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좀 제한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오바마는 노 전 대통령처럼 소탈함과 동시에 격식이라는 것에도 신경을 쓰는 스타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소탈함이 강점이었지만, 반대로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층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달변가이고 말 한마디로 청중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몇몇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 중에서 완성형 형태는 없었다. DJ(고 김대중 대통령)도 명연설가였지만, 너무 연로해서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들이 많아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책임감 등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하지만 군 조직을 이용했다는 점이 있다. 군 조직을 이용한 것이 그 시대에는 통했을지 모르지만, 그걸 롤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역대 대통령을 다 좋게 평가하지만, 롤 모델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찾는다면 오바마 대통령 느낌이 나는 정도이다.
2004년 하버드대학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오바마가 연설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하버드에서 유행했던 게 아이팟에 오바마의 연설을 넣고 계속 듣는 것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심지어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가 있다.
‘부모님은 제게 아프리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축복받은'이라는 의미의 '버락'입니다. 이 이름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종이 성공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 이슈였는데 미국 내 상당한 대립이 있었다. 이때 오바마가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라크를 지지하는 애국자도 있고, 반대하는 애국자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거기서 다 정리됐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까. 정치란 게 어느 정도는 언어의 마술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없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통령의 연설을 파일로 담아서 듣고 다니는 경우는 없지 않나. 아마도 그게 다음 세대의 정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여의도광장에서 100만 관중에게 연설했던 때가 있었다. 매력적인 정치의 모습을 잊은 것 같다. 청년들이 연설에 감동해 다시 한번 정치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