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해마다 이맘때면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해 발표한다. 올해는 ‘혼용무도(昏庸無道)’이다. 선정 이유는 "메르스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의회주의와 삼권분립을 훼손했으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국력을 낭비했다"는 점을 들었다. 한마디로 무능(無能)하고, 무도(無道)하다는 것이다.
사자성어이니 한 글자씩 따져보자. 먼저 혼(昏)은 어둡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해(日)가 뿌리를 뜻하는 씨(氏)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서산 나뭇가지에 걸쳐 있던 태양이 뉘엿뉘엿 나무뿌리 아래쪽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황혼(黃昏)은 차차 거무스름해지는 하늘 저편 서쪽 산등성이에 누런 빛이 감도는 때이다.
이 혼(昏)은 어두울 암(暗)과 함께 쓰인다. 차이가 있다면 ‘황혼’과 ‘암흑’ 정도 밝기일 것이다. 황혼은 그래도 누르스름한 빛이라도 있지만, 암흑(暗黑)은 아예 칠흑처럼 깜깜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어두울 혼과 어두울 암이 만난 혼암(昏暗)은 ‘어둡고 몹시 캄캄하다’는 뜻이다.
‘혼’과 ‘암’이 사람을 지칭하는 대명사 앞에 붙으면 대체로 어리석고 우매(愚昧)하다는 뜻이 된다. 혼군(昏君)이나 암군(暗君)은 그래서 우매한 임금을 가리킨다. 사전적으로는 똑 같은 뜻인데, 어떤 이는 굳이 구별하기도 한다. ‘혼군’은 잘못된 정책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경우, ‘암군’은 유체이탈 어법으로 국민의 복장이 터져 암(癌)에 걸릴 지경으로 만드는 경우로 말이다.
여하튼 혼(昏)이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혼미(昏迷)하다, 몽혼(朦昏)하다, 혼수상태이다 등에 들어가는 한자이다.
이번에는 ‘용(庸)’이다. 얼핏 보면 중용(中庸)에 쓰이는 한자여서 좋은 뜻으로 비친다. 원래 중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이다. 그럴 듯한 뜻풀이다. 그런데 용(庸)자만 보면, 한자의 훈이 ‘못날 용’이다. 무능하다는 뜻이다. 주로 모자라고 열등하다는 뜻의 ‘열(劣)’과 함께 용렬(庸劣)하다는 단어가 많이 쓰이는데, 사람이 변변하지 못하고 졸렬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혼용(昏庸)은 어리석고 우매하며 무능하다는 말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현명(賢明)’의 반대로 쓰인다. 예컨대 ‘현명한 관원’은 ‘일을 아주 잘 처리하는 관원’이고, ‘혼용한 관원’은 ‘일을 아주 못하는 관원’이란 뜻이다.
무도(無道)는 공자(孔子)의 ‘천하무도(天下無道)’에서 따왔다. 천하에 도리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가 이뤄지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치환하면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고, 관료가 관료답지 못하다’ 쯤이다.
혼용무도(昏庸無道)는 그래서 지도자가 무능하면서 도리에 어긋난다, 즉 ‘무능무도(無能無道)’하다는 의미이다. 묘한 것은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가 이 정권 들어서 3년 연속 최고지도자를 겨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13년에는 ‘도행역시(倒行逆施)’였다. 이 사자성어의 유래는 이렇다.
춘추시대 오자서(伍子胥)가 부친을 대신해 설욕한다며 초나라 평왕의 묘를 파헤쳐 시체를 꺼내 매질하자 주위에서 비난이 일었다. 이에 오자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알지만 부득이하게 순리를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후 잘못된 길을 고집하는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정착됐다. 교수신문은 최고 지도자가 펼치는 정국(政局)이 마치 오자서가 부친의 억울함을 해원 또는 한풀이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꼬집은 것이다.
이어 2014년에는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는 뜻인데, 진나라 2세황제 때 환관 조고(趙高)로부터 비롯됐다. 조고가 자신의 위세를 가늠하기 위해 궁정에 사슴을 끌고 왔다. 왕이 "웬 사슴인가" 묻자 조고가 "사슴이 아니라 말"이라고 대답한다. 왕이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 "말입니다" 복창한다. 이에 왕은 "내 머리가 이상해졌나"하며 들어가고, 정권은 온통 조고가 쥐고 흔들게 된다.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이처럼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말에는 조고처럼 상전을 농락하는 간악한 관리를 경계하는 뜻도 담고 있지만, 간악한 관리에 붙잡혀 사리분별을 못하는 우매한 지도자를 비판하는 뜻도 담겨 있다. 결국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한’ 무도(無道)한 정치상황을 뭉뚱그려 상징한 것일 터이다.
필자는 이번에 선정된 사자성어 ‘혼용무도(昏庸無道)’보다 2위 ‘사시이비(似是而非)’에 이어 3위에 랭크 된 ‘갈택이어(竭澤而魚)’와 4위 ‘위여누란(危如累卵)’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연못의 물을 모두 뽑아내 물고기를 잡는 현실, 그래서 미래가 없고 마치 계란을 쌓은 듯 위태로운 상황이 지금(Now) 여기(Here)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자성어가 아닌가. 지금(now)과 여기(here)를 붙여 쓰면 ‘Nowhere(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이상향(Utopia)일 수도 있지만, 비현실일 수도 있다.
여하튼 올해의 ‘혼용무도(昏庸無道)’가 내년에는 ‘현명정도(賢明正道)’가 됐으면 좋겠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고통스런 고문(拷問)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어야 숨이라도 쉴 수 있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