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포토스토리 ②] 거제 '섬 소년'에서 한국 정치 '큰 산'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저는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저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왔다고 외쳤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민주화의 큰 별이 졌다." 고(故) 김영삼(향년 88세)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파란만장했던 삶을 뒤로하고 서거했다. 굴곡진 한국 정치사의 '산증인'이었던 'YS'의 서거에 정·재계를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그의 지난 시간을 반추하며 애도를 표하고 있다. 추억 속 '사진'에서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편집자 주>

[더팩트 | 서민지 기자] 향년 88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생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집념과 결단의 역사였다. 거제의 섬 소년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을 겪었다. 한국 민주화 투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소원하던 문민정부를 탄생시켰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취임 이후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대형 참사가 이어진 데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한국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지율 90%에서 결국 끝자락엔 궁지에 몰리는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27년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큰달섬에서 김홍조와 박부련의 3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학생 시절 김 전 대통령(오른쪽).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큰달섬에서 김홍조와 박부련의 3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명의 형제를 어릴 때 잃어 외아들로 자랐다. 김 전 대통령 집안은 조부가 거제도에서 일군 멸치 어장을 소유한 향토 부자였다.

김 전 대통령은 중학교 시절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다. 일본 학생들이 거제도를 '거지도'라고 모욕했기 때문이다. 일본 학생과 다퉈 정학을 두 번 당했고, 일제의 강제적 식민통치에 반발하다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혹독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해 10월 14일 서울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사진.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하지만 이 무렵 해방됐고, 1945년 11월 김 전 대통령은 경남중학교로 전학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때부터 장래 희망을 대통령으로 정하고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붓글씨를 붙여놓고 꿈을 키웠다. 이후 경남중학교 안용백 교장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철학을 전공하기로 해 1947년 9월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28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대학교 2학년 때 정부 수립 기념 웅변대회에 참가해 2등 외무부장관상을 받았고, 이를 눈여겨본 당시 외무부 장관 장택상 전 총리가 김 전 대통령을 비서관으로 불러들여 정계에 입문했다. 김 전 대통령은 6·25 전쟁이 끝난 뒤 이듬해인 1954년 5월 자유당 소속으로 경남 거제시 지역구에 출마해 28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1972년 유신 선포 소식에 미국에서 급거 귀국한 뒤 바로 가택연금 당한 김 전 대통령.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국회에 입성한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1955년 4월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김 전 대통령은 1969년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주도하자 유신과 권위주의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면서 집 근처에서 괴한들로부터 습격당하고 승용차 창문에 초산이 뿌려진 '초산 테러' 사건을 겪고, 유신 시대가 시작되자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한다.

김 전 대통령은 1974년 만45세의 나이로 최연소 야당총재인 신민당 총재에 선출됐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유신독재와 격렬히 싸우던 김 전 대통령은 야당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그는 "새로운 민주질서를 정립하기 위한 범국민적 양해와 동의를 얻을 수 있도록"을 외치며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에 선출됐다. 이때 박 전 대통령과 맞서 의원직을 제명당했고 그 유명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는 김 전 대통령.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이후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고 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패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곧 '3당 합당'으로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정면 돌파하면서 결국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으로 올랐다. 그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취임식을 열고 "저는 오로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저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왔다"고 외치며 '김영삼 시대'를 열었다.

서재에서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김 전 대통령.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하나회 척결과 군대 인사 개혁,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1995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 등 과감한 개혁을 실시하면서 지지율 90%가 넘었고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3월 무궁화호 열차 전복, 같은 해 7월 아시아나 항공기 해남 야산 추락, 같은 해 10월 전라북도 부안군 앞바다 서해 페리호 침몰, 이듬해 10월 한강 성수대교 붕괴 등 수많은 대형참사를 맞으면서 풍파를 겪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성장통을 온몸으로 이겨낸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김 전 대통령은 오전 0시 22분 향년 88세로 서거했다.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빈소.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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