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 영화감독 이준익은 내재적 갈등을 풀어내는 천재적 자질을 갖췄다고 본다. 2005년작 ‘왕의 남자’는 계급갈등을 소재로 다뤘다. 줄타기로 시작해서 줄타기로 끝나는 영화의 설정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 엉거주춤 위험하게 서있는 백성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마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가 "인간은 금수(禽獸)와 신(神) 사이에서 위태하게 줄타기하는 존재"라고 갈파한 것처럼.
그러면서 해법으로 '초인(Uebermensch)'을 제안한다. ‘왕의 남자’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잃은 주인공이 줄 위에서 ‘공중부양’함으로써 끝맺는 것은 바로 이러한 ‘초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앞선 2003년작 ‘황산벌’의 소재는 지역갈등이다.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소재를 해학과 외부적 갈등(당나라)으로 풀어낸다. 백제가 진 싸움인데, 국가간 전쟁을 짐짓 내전(內戰)화 한다. 요즘 대두되는 ‘변경의 역사’ 눈으로 보면 ‘국가주의 역사관’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여하튼 이 영화에서 계백으로 분한 박중훈이 가족을 죽이기 전에 명 대사를 읊조린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여!” 그렇다. ‘강자존(强者存)’이 아니라 ‘존자강(存者强)’이다. 살아남는데 체면은 중요하지 않다.
본인이 사나이로서 최대 치욕인 궁형(宮刑)을 당하고도 생존을 선택했던 사마천은 결국 ‘사기(史記)’로 승리한다. 그래서일까. ‘사기’엔 ‘살아남는 자’의 승리가 상당수 담겨 있다. 방연에게 무릎을 잘리고 ‘인돈(人豚)’이 됐던 손빈이 결국 멋들어지게 복수하지 않던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 진정한 승자이며, 그는 바로 ‘살아남은 자’이다. 역사는 바로 이 승자, 살아남은 자가 기록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진정한 승자, 최후까지 살아남은 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겸허함’이다. 어쩌면 자진하고픈, 자결해야만 할 상황에서도 모든 허물을 자신에서 찾는 겸허함이야말로 승자의 덕목이다. ‘겸허(謙虛)’는 겸손함과 비움의 결합이다.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노자도 도덕경에서 ‘허이불굴(虛而不屈)’이라 했다. 비어있으면서도 다하지도, 굴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겸허에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뜻 외에 무척 심오한 뜻이 하나 더 있다. ‘자기의 무력(無力)과 죄업(罪業)에 대한 심각한 자각에서 우러나오는, 신(神)의 뜻에 어디까지나 순종하려는 마음’이다. 이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와도 닿아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가장 낮은 곳에 머문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겸(謙)’은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길(吉)한 괘이다. 주역은 4가지 ‘겸’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겸겸(謙謙)’이다. ‘겸’이 중복돼 있으니, 겸손하고 또 겸손하다는 뜻이다. 이 도를 이룬 군자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이겨낼 수 있다. 성현군자쯤일 것이다. 두 번째는 ‘명겸(鳴謙)’이다. 문자대로 해석한다면 ‘소리가 나는 겸손’이다. 현실에 비추면 겸양의 덕을 갖춘 정치인쯤이다. 세 번째는 ‘노겸(勞謙)’이다. 노력하여 겸손의 도에 이른 부류다. 보통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경지이다. 네 번째는 ‘휘겸(撝謙)’인데, 생각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마치 도통한 선인과 같은 경지이다.
현실 정치에서는 ‘명겸(鳴謙)’이 덕목일 것이다. 목적을 위해 잠시 후퇴하거나 거짓 굴복하는 것도 ‘명겸’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바람직한 겸손의 경지일 것이다. 주역강의로 유명한 서대원 선생은 “진정한 겸손은 무조건 베풀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대의를 해치는 것에 대해서는 무력으로라도 응징하는 것이 겸양의 참모습이다”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목적을 위해 후퇴와 굴복을 해도, 무력으로 응징해도 겸손하다 하는가. 바로 ‘천하의 이로움’이다. 묵자(墨子)는 “정치의 목적은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라 했다. 그 방법론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바로 예수님 말씀이 아닌가.
천하의 모든 재앙과 약탈과 원망과 한탄은 서로 사랑하지 않고 더불어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빈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거만하고 교활해지며, 약삭빠른 자는 사람을 속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만이 정치의 목적인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겸애(兼愛)설’이다. 이 겸애의 근본이 바로 ‘겸손’인 것이다. 겸손하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겸손과 겸허함이야말로 최고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매우 논쟁적인데, 과연 ‘효율적인 군주정’을 위한 저작인가, ‘효과적인 공화정’을 위한 저작인가부터가 그렇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에도 ‘제왕적인 권력’을 가진 ‘한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다. 어쩌면 지배의 욕구를 가진 자들에게는 그래서 복음서로 여겨질 법하다. 하지만 그는 “군주정이라도 ‘지배를 거부하는 다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즉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야말로 군주정 존속에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고 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겸손과 겸허함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장자크 루소가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아니라 인민들을 계몽하고자 했음에도 피상적인 독서에 희생됐다”고 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론 출간이 마키아벨리 사후 1516년에 이뤄졌고, 그 생전인 1513년에 탈고된 수기(手記)본을 접할 수 있는 사람도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점에서 ‘지배 욕구를 가진 소수’가 설득의 대상이라는 주장이 강력하다.
여하튼 마키아벨리는 폭군(Despotes)과 참주(Tyrannos)에 구별을 둔다. 참주는 시민들의 귀족의 전횡을 견디다 못해 옹립한 지도자이다. 그런데 이 지도자는 권력을 쟁취한 후에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혹독하게 통치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결과는 혁명이다.
혁명(革命)은 무엇인가. 바로 천명(天命)을 바꾸는(革) 것이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맹자(孟子)에게 묻는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弑害)해도 되는가.” 맹자가 답한다. “인(仁)을 해치면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면 잔(殘)이라 한다. 잔적(殘賊)한 자는 일부(一夫)라 한다.” 왕이 아니라 그저 필부(匹夫)를 참했다는 것이다. 천명(天命)을 내세워 은(殷)의 탕왕(湯王)이 걸(桀)을, 주(周)의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고 나라를 세운 것을 정당화한 것이다. 탕무(湯武)의 유혈 혁명은 방벌(放伐)이고, 요순우(堯舜禹)로 이어지는 무혈 혁명은 선양(禪讓)이다. 요즘으로 보면 ‘방벌’은 성난 시민들에 의한 급작스런 정권교체, ‘선양’은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쯤일 것이다.
그러면 이 혁명을 피하려면 참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주는 귀족의 음모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권력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로운 존재이다. 따라서 참주는 ‘자기만의 군대’도 필요하지만, ‘시민들의 지지’가 불가결하다. 바로 시민들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것이 오히려 스스로 권력을 좀더 존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정치로 대입해 보면 귀족은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인쯤이다. 이들 정치인들은 자신을 위해 언제라도 참주를 음해하거나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 지도자가 공화정이 아니라 군주정을 선호한다면 결국 대의정치가 아니라 대중정치, 포퓰리즘에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한 헌법을 들먹인 것은 대중정치에 대한 대의정치의 반격으로 비친다. 비록 생채기와 흔적만 남겼지만.
우리의 정치체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고들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모든 정치행위가 다분히 ‘효율적인 군주정’과 ‘효과적인 공화정’이 교집합 하는 어디쯤엔가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이런 체제에서 지도자의 최후의 덕목은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대로 겸손과 겸허함일 것이다.
그런데 겸손은 강자의 몫이다. 진정 강자만이 겸손할 수 있다. 약자의 겸손은 비굴함이거나 자기기만이다. 정치지도자라면, 그것도 꼭지점에 위치한 지도자라면 주역의 ‘겸겸(謙謙)’은 몰라는 ‘명겸(鳴謙)’ 정도는 지나친 기대가 아니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놓고 ‘국론분열’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 그 근저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일조(一助)하고 있지 싶다. 통일이 ‘국시(國是)’라고 했다가 국회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통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운동화도 나이키로 통일하고, 가방도 이스트팩으로 통일하고, 핸드백도 비록 짝퉁으로라도 루이뷔통으로 통일하지 않는가. 음식점에서 자장면이나 짬뽕으로 통일하지 않았나.
하지만 요즘은 개성 시대이다. 신발도, 가방도, 음식점에서 주문도 일부러(!) 다르게 한다. 획일화로는 개성이 발휘될 수 없다. 그래서 경제도 획일적 대량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가 아니라, 다양성과 개성의 ‘창조경제’ 시대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이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와도 결이 맞이 않는 것으로 보인다. ‘국정화를 통한 창조’는 ‘획일적 다양성’이란 뜻인데, 그 논리 구조는 ‘차가운 불’이나 ‘뜨거운 얼음’과 같아 보인다. 아마도 이 차가운 불의 온도를 잰다면 ‘화씨 451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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