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오후 1시께 한 60대 남성이 80대 노인을 졸졸 좇습니다. 이 60대 남성처럼 여러 사람들이 노인을 에워싸자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집니다. 남성은 어떻게든 한자리를 차지하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얼굴을 내밉니다. 꽤 유명한 분(?)께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눈길을 끕니다.
그 남성이 '누구'냐고요? 바로 김문수(64) 전 경기도지사입니다. 이날 김 전 지사는 대구시 동구 대현로에 위치한 대구공업고등학교에서 열린 대구공고 총동문회 체육대회 현장을 찾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같은 시각 전두환(84) 전 대통령도 이순자(76) 여사와 함께 3년 만에 모교를 방문했고, 약 1000여 명의 동문 후배들과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했습니다. 이날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처음엔 김 전 지사가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동문 후배인 줄 알았습니다. 주인공 바로 옆자리도 아니고 다수의 전 전 대통령의 후배들과 뒤섞여 포즈를 취하려 '애쓰는' 모습에 언뜻 일반인처럼 보였으니까요. 알고 보니 동문도 아닙니다. 그는 같은 지역의 경북고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김 전 지사는 주말의 화창한 일요일에 체육대회를 찾았을까요. 내년 총선의 '핫 주자'로 꼽히는 그는 지난 8월 대구 수성갑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총선에 대비해 이미 대구에 진지를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동문들도 그의 총선 출마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동문은 "(출마 때문이지) 왜 왔겠냐"고 반문했습니다.
주인공인 전 전 대통령이 떠나고 난 자리 옆쪽에선 김 전 지사의 기념사진 퍼레이드가 펼쳐졌습니다. '정칫밥' 먹은 분답게 '꼽사리' 전략이 돋보였습니다. '꼽사리'가 뭔가요. 남이 노는 판에 거저 끼어드는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김 전 지사는 전 전 대통령 후배 동문들의 수많은 기념사진 촬영 요청에도 웃으며 함께 파이팅을 외쳤고, '김문수' 석자가 박힌 명함도 아낌없이 나눠줬습니다. 때문에 주머니 속 명함은 금세 동났습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던 그도 '총선 때문에 왔냐'는 취재진의 돌직구엔 순간 얼굴이 굳었습니다. "체육대회를 하니까 왔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계속된 질문에도 김 전 지사는 '총선' 질문을 한 이후론 답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렸습니다.
행사 내내 즐거워 보였던 전 전 대통령 역시 얼굴이 일그러진 순간이 있습니다. 모교에 대한 애정이 큰 전 전 대통령은 검찰과 국회의 미납 추징금 환수 작업이 있은 지 2년 만에 공식 석상에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흔치 않은 기회이기에 취재진도 묻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환수율이 절반을 겨우 넘은 상황''딸인 전효선 서경대 교수의 수업 중 학생들을 내쫓은 논란''환수 작업과 관련해 국민들께 전할 말' 등 말입니다.
개회식 전 오전 10시께 드디어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등장했고, 취재진은 경호원 사이를 뚫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란 질문 세례에 전 전 대통령이 입을 열었습니다. "소감은 무슨 소감!"이라는 게 그의 소감(?)이었습니다.
그의 한마디와 얼굴 표정엔 짜증이 확 묻어났습니다. 단 한마디였지만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그의 육성을 생생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힘이 실렸습니다.
목소리처럼 전 전 대통령은 건재했습니다. 세월의 주름살은 있을지 몰라도 꼿꼿한 몸짓과 태도엔 군사정권을 장악했던 과거의 위엄이 베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후배들은 그를 여전히 '각하'로 불렀습니다. 또한 약 3시간에 걸친, '열병식'을 연상케할 만큼의 퍼레이드로 그를 맞았습니다. 후배들의 환영 인사에 전 전 대통령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와 절제된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찰나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열병식이 오버랩됐습니다.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
최근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의 앞에서 울분을 토합니다. 군주로서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힌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분노와 구부러질지언정 미쳐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회한이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와 자신에게 묻는 자성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는 '절망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던지는 물음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누군가는 묻습니다. 두 분은 '떳떳'하십니까.
▶[영상] 김문수, 전두환 부부 옆에서 '얼굴 알리기' 열중
[더팩트 | 오경희 기자 ari@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