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지금은 쫄쫄 굶은 ‘상원의 개’ 신세
언론에 갑자기 개 이야기가 무성하다. 하나는 충견(忠犬), 다른 하나는 분구(糞狗:똥개)다. 충견은 박근혜 정권 출범 때 법무부 장관에 기용돼 총리 후보까지 오른 ‘미스터 국가보안법’, 바로 황교안 씨에 대한 이른바 진보 매체의 비유다. 헌법보다 국가보안법을 더 중요시한다며, 국민보다 박근혜 대통령을 더 우선시한다며 비판 일색이다. 물론 다른 한쪽에선 개혁과 경제활성화란 국정과제의 고삐를 죌 수 있는 적임자란 평가도 있다.
분구는 지난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에서 노건호 씨가 행사에 참석한 여당 대표를 향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추도식에 찾아온 인사에게 비례(非禮)이자 무례(無禮)로도 보인다. 비아냥도 그렇고, 비유도 그렇다. 흉한 말이 오가는 여의도도 아니고, 당사자가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 씨라는 점에서 놀랍다. 어떤 속셈이 아니라 속마음이 담겼겠지만, 43세의 중년이면 표현에 좀더 신중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가족뿐 아니라 사회 각계가 참석한 부친의 추도식이라면 매우 공적인 자리이다. 비록 원수가 참석했더라도 일단은 예의를 갖추는 것이 ‘진정한 대인의 풍모’일 것이다.
노 씨가 비아냥거렸지만, 그래도 개에게 똥은 밥이다. 신성한 먹거리인 것이다. ‘부지런한 개가 더운 똥을 먹는다’는 속담도 그래서 있다. 서양의 ‘부지런한 새’보다는 좀더 친근한 비유가 아닌가. 물론 ‘개 따라가면 측간(厠間)에 간다’는 말도 있다. 나쁜 친구 따라가면 나쁜 곳으로 가게 된다는 뜻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뒤가 급할 때 개가 가이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 아니겠나. 속담도 때론 현대적 해석이 필요하다. 양두구육(羊頭狗肉)도 양 머리 걸어놓고 개고기를 속여 판다는 말이지만, 요즘이야 개고기가 더 비싸니 차라리 ‘순박한 양처럼 꾸미고 실제는 개처럼 군다’는 게 어떨까.
말 나온 김에 오늘의 ‘술자리 인문학’도 개소리로 시작할까 한다. 개는 1만5000년 전쯤 인간의 친구로 길들여졌다고 한다. 최근 화석 연구는 3만년 전에 늑대와 다른 진화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개와 인간은 서로 의지하며 동반자로 발전해 왔다. 경계와 보호에서 먹거리의 교환과 심리적 위안까지 다양하게 반려(伴侶)하고 있다. 고양이가 주인의 무릎이 따뜻해서 오르는 반면 개는 그저 좋아서, 친밀감으로 오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애증은 교차하는 것 같다. 서양이나 우리나 욕설에서 개가 빠지지 않는다. ‘개 자식’은 인류 보편의 욕설이 아닐까. 일본은 개보다 ‘말과 사슴(馬鹿)’을 욕설화했다. 워낙 체면을 중요시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못하는 민족인지라 ‘지록위마(指鹿爲馬)’에서 말과 사슴도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쯤으로 비하하는 것을 최악의 욕설로 친다. 오히려 개는 호부견자(虎父犬子)에 쓴다. ‘호랑이 아비에 개 자식’이란 말로, 제삼자가 아비의 훌륭함을 견줘 말할 때 쓰는 비유적 표현이다.
여하튼 한자의 견(犬)은 ‘사람이 큰 대(大)자 모양으로 뻗어 있고, 머리 옆에 술병이 놓인 모습을 점으로 찍어 상형화 한 것’이라는 우스개가 그럴 듯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술 취하면 개가 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본디의 상형문자는 점이 개의 머리부분이고, 네모난 머리를 점으로 축약한 게 지금의 한자이다.
오히려 구(狗)가 상형문자가 아닌 표의문자이다. 짐승을 뜻하는 개사슴록변에 소리로 구별하는 구(句)가 붙어있는 것이다. 같은 개라도 견(犬)과 구(狗)는 크게 다르다. 견(犬)은 충견, 애완견처럼 먹지 않는 개이다. 구(拘)는 백구, 황구와 같이 식용하는 개이다. 그래서 구탕(拘湯)이라고 하지, 견탕(犬湯)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한자속담도 견(犬)과 구(狗)를 조금 달리한다. 예컨대, 표를 얻기 위해 열심히 뛰는 정치인에게 ‘개 발바닥에 땀 난다(犬足發汗)’는 표현은 찬사일 수 있다. 사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개는 땀샘이 없어 혀로 체온을 조절한다. 달리는 개가 혀를 쭉 내미는 이유이다. 반대로 뛰어야 할 때 빈둥빈둥 게으르게 뒷전에 앉아 소위 뒷담화 하는 정치인은 ‘개 발바닥에 털 난다(犬足生毛)’고 한다. 그들의 발바닥에 땀이 나는지 털이 나는지 챙겨볼 일이다.
반면 금도(襟度)를 넘어 인신공격을 일삼는 정치인이 과연 ‘제 버릇 개 줄까’라거나 ‘개 꼬리 삼 년 묵혀도 황모 못 된다(三年狗尾 不爲黃毛)’고 할 때, 또 참견할 데 안 가리고 끼다 ‘개 밥에 도토리 신세(狗飯橡實)’가 됐을 때 구(狗)를 쓴다.
아마도 가장 익숙한 속담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가 아닐까. 지붕만 쳐다보는 개가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닭 놓친 주제에 ‘견설고골(犬齧枯骨)’ 신세가 처량하다. 개가 마른 뼈 물어뜯는다는 뜻이다. 계륵(鷄肋)은 그래도 ‘춘천닭갈비’로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살점도, 핏기도 없는 마른 뼈다귀를 갉아대는 모습에서 요즘의 야당을 떠올리면 좀 지나친가. 이를 보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여당은 ‘나 먹자니 싫어도 개 주기는 아깝다’며 그나마 치워버리는 형국이고.
야당이야 지금은 쫄쫄 굶은 ‘상원의 개’ 신세이자,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는 ‘상갓집 개’의 형국이다. 그야말로 지리멸렬 상태를 보이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을 향해 짖는 개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런 개는 미친 상황인데, 몽둥이 찜질이 약이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 표(票)가 몽둥이인데, 엉뚱한 개를 때리거나 헛손질도 한다. 그러니 배은망덕한 개라는 뜻의 ‘새구폐주(塞狗吠主)’가 체념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미 ‘호랑이에게 개 꾸어준’ 상황이라는 자조(自嘲)로 말이다. 과연 꾸어준 개를 돌려받을 수 있겠나.
지난 번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전면적인 사정(司正)을 말할 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糞犬吠糠犬)’는 속담을 인용했었다. 이번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어쨌거나 충견(忠犬)으로 불리고 있으니 어떻게든 청문과정을 통과할 것이다. 그리고 정상화를 향한 사정을 진두지휘 하는 맹견(猛犬)이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런데 몇몇 언론들이 벌써부터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바로 역사 인식문제이다. 4.19가 혼란이고 5.16이 혁명인가. 아니면 4.19가 혁명이고 5.16이 쿠데타인가. 어느 쪽 생각이 비정상이고, 어느 쪽 인식이 정상인가. 비정상의 정상화란 자신이 썼던 4.19 혼란과 5.16 혁명을 시대정의에 맞게 4.19 혁명과 5.16 쿠데타로 교정한다는 뜻인가. 반대로 확립된 시대정신을 비정상으로 보고 과거 회귀로 정상화하겠다는 것인가. 지켜볼 일이다.
야당으로서는 한번 상추 밭에 똥을 싼 개를 계속 의심하게 마련이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기야 흔한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데, 상추 밭의 개똥도 유기 비료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개똥밭도 저승보다 낫고, 살아있는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 어쨌건 주어진 목표물을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지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박 대통령도 “청와대 실세는 진돗개”라고 말하지 않던가.
벌써 한여름 더위다. 전국 곳곳이 30도을 웃돈다. 황구는 복날이 슬플 텐데, 야속한 인간들이 삼복(三伏)을 오복(五伏)으로 만들었다. ‘광복’에 서울 ‘수복’까지. 그래도 비가 내리면 황구는 한숨 돌린다. 보신탕 집 주인은 한숨 내쉬지만. ‘땡칠이족’도 우중구탕(雨中狗湯)을 삼가는 것이다. 혹시 비 오는 날 처마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던 양반 이야기가 떠올라설까. 방안에서 “개건 가지(비가 개면 가지)”라고 중의적 농담을 던지자, 처마 밑 양반은 한참 기다리다 비가 그치자 방안을 휘둘러 보면서 “다 개니 가야겠군”이라고 멋지게 복수한다. 비는 개기 마련이다.
오늘 칼럼은 개를 주제로 한 우리 속담을 주절주절 엮었다. 허튼 ‘개소리’란 비아냥은 삼갔으면 한다. 개는 “공자왈, 맹자왈”로 짖는다고 쓴 적이 있다. 바로 당구풍월(堂狗風月)인데, ‘컹컹’은 공자(孔子)의 중국발음 ‘컹(콩)쯔’, ‘멍멍’은 맹자(孟子)의 중국발음 ‘멍쯔’를 뜻한다. ‘왈왈’은 공자왈, 맹자왈의 ‘왈왈(曰曰)’이다. 그러하니 개소리가 인간들의 허튼 소리보다 오히려 순수하고, 진실되고, 현명하다. 잡소리 없이 본능적인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온 몸으로 짖는 것이다.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