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탐사] '권력 1번지' 구기동·평창동 '어제와 오늘'

왕(王)기(氣)가 서린 땅 서울 종로구 구기동·평창동은 한때 정치인들이 많이 살아서 권력 1번지로 불렸다. 더팩트는 지난 22일 두 곳을 찾았다./부동산 제공

권력을 의미하는 '산'이 감싼 '부촌'

서울 종로구 '구기동·평창동'은 한때 정치인들이 많이 살아서 '권력 1번지'로 불렸다. 두 곳 모두 서울 종로구에 속하는데, 청와대 인근이어서 '정치 1번지'로도 통한다. 대권을 바라보는 거물급 정치인들은 종로에 터를 잡았다.

최근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구기동에 전셋집을 얻으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구기동에 산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구설에 오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평창동에서 지내고 있다.

<더팩트>는 지난 22일 과거 '왕(王)기(氣)가 서린 땅'이라 불린 그곳, 종로구 평창동·구기동을 찾았다.

◆ "'정치 1번지'도 옛말?"

산 중턱에 위치한 문 대표의 자택. 구기동 골목길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다 보면 사이사이 고급 빌라들과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구기동에 있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자택(위)과 건물 옆에서 바라본 구기동 일대./구기동=서민지 기자

마치 요새 같다. 구기동·평창동 일대는 북한산에 둘러싸여 있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은 집들은 '권력 1번지' 답게 호화로운 자태를 뽐낸다. 과거 '산촌'에서 '부촌'으로 탈바꿈했다는 말 그대로였다. 풍수적으로 권력을 의미하는 산이 감싼 공간을 보국이라고 하는데, 대개 부자 동네는 보국 안에 둥지를 틀었다.

먼저 문 대표의 자택 쪽으로 향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파르지만 잘 포장된 도로 위로 고급 빌라와 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동네 주민들은 문 대표가 구기동 주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 대표의 자택 앞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예전에는 정치인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요즘은 없다. 일반인들이 유입되면서 다 떠난걸로 안다"면서 "저기 빌라에 문재인 씨가 산다는 말을 남편에게 들었다. 남편이 두어 번 실제로 봤다고 했다. 최근 손학규 씨도 이 근처로 이사왔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표의 자택 앞.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문 대표의 자택을 4억 원선의 서민형 빌라라고 소개했다./구기동=서민지 기자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구기동은 옛 정치인들이 많이 산다. 김현철 씨나 나이가 지긋한 원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구기동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한양대 특임교수, 김종인 전 경제수석 등이 거주한다. 고 박준규 전 국회의장, 이회창 전 국무총리,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도 평창동 또는 구기동에 살았던 적 있다.

그는 "구기동 자체가 큰 고급빌라들이 많다. 예전에는 대가족이니 많이 선호했는데 이젠 가족도 많이 줄고, 특히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보면 고급 빌라는 안 좋기 때문에 요즘 떠오르는 정치인들은 안 사는 것 같다. 살아도 문 대표가 사는 서민형 빌라에 거주한다. 문 대표가 사는 'OO빌라'는 4억 원 선이다. 손 전 상임고문도 마찬가지다"라고 귀띔했다.

김철근 새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이날 <더팩트>와 통화에서 '문 대표 집 옆으로 손 전 상임고문이 이사를 온 것'에 대해 "표면적으론 분당에 살다가 임대기간이 끝나서 옮긴 것이다.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자면 새정치민주연합 당내 분위기가 완전 리모델링을 하거나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하는 기조가 보인다"면서 "옆으로 이사 왔다는 건 손 전 상임고문이 정계복귀를 할 수 있는지와 맞물렸다고 본다"고 해석했다.

◆ '명당' or '시련'의 땅?

평창동에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자택. 담쟁이 덩쿨에 둘러쌓인 높은 담장에 내부 건물이 가려져 있다./평창동=서민지 기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문 대표의 자택에서 차로 10분(2.5km) 거리인 평창동에 살고 있다. 김 전 실장의 주변은 구기동과 달리 넓은 터에 고급 개인주택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릴만큼 조용한데다 우거진 나무들, 높은 지대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김 전 비서실장이 사는 곳은 '한국풍수지리협회'가 손꼽은 서울 최고의 양택지다. 한국풍수지리협회장은 "평창동은 터가 좋다. 세계적인 명당"이라면서 "김정호가 이 동네 생기기 전부터 대동여지도에 명당으로 표시해 둘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알고 그린벨트를 풀고 개발 지시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만큼 시세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빌라는 평당 1000~1500만 원 정도, 단독 주택은 1000~2000만 원 선"이라면서 "예전보다는 정치인들이 많이 살진 않지만 동네가 조용해서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고 쾌적하기 때문에 여전히 재계 인사들이 많이 사는 부촌"이라고 밝혔다.

높은 지대에서 바라본 평창동 일대와 내부 골목. 평창동에 거주하는 한국풍수지리협회장은 평창동은 대동여지도에 김정호가 표시해 놨을 만큼 명당이라고 설명했다./평창동=서민지 기자

김철근 소장은 "종로는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라면서 "근처 청운동엔 고 정주영 회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종로를 지역구로 해 출마할 당시에 살았다. 여야 대통령과 유력 정치인들이 많이 살다보니 명당 자리가 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삼성동,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논현동으로 이사가서 신흥 '정치 1번가'로 강남이 화제가 되고 있지만 박원순 서울시장도 가회동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종로구 일대가 '정치 1번가'로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명당으로 이사한 이들의 정치적 운명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김 전 실장은 재직 당시 '십상시 파문' 등으로 위기에 놓였다. 또 비서실장에서 사퇴한 지 석 달 만에 '성완종 파문'에 연루됐다. 김현철 교수는 YS정권 말미에 비리 의혹 등으로 옥고 생활을 겪으며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1998년까지 구기동 주민이었던 이회창 전 총리는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종로구 옥인동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지만 대권을 잡을 수 없었다.

평창동 주민인 경비원 A 씨(60대)는 "예전엔 평창동에 정치인들이 많이 살았지만 '터가 안좋다'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것 같더라"며 "가만히 보면 돈과 권력을 쥐었지만 왕의 자리엔 못 오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풍수지리협회장은 "잘 풀리다가도 태풍을 맞기도 하는 거다. 지금까지는 잘 풀리지 않았느냐. 터는 정말 좋은 곳"이라고 강조했다.

[더팩트 | 구기동·평창동=오경희·서민지 기자 ar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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