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술자리 인문학] 용패? 꽃놀이 패? 홍준표와 '패감'의 운명

홍준표 지사의 패감 상대가 받아 줄까? 바둑판 속담에 “고수(高手)는 패감을 아끼다 판을 망치고, 하수(下手)는 패감을 없애서 판을 망친다”는 말이 있다. /더팩트DB

홍 지사 "이번에는 패감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

바둑에서 ‘패(覇)’는 흑백(黑白) 양쪽 돌이 서로 단수(單手)로 몰린 상태이다. 패에서는 상대가 단수를 쳤을 때 곧바로 되따내지 못하고 다른 곳에 한 번 둔 후에야 따낼 수 있다. 이때 다른 곳에 두는 것을 패감이라고 한다. 문제는 상대가 받아 주느냐다. 받아 주면 패가 계속 되지만, 받아 주지 않으면 패는 해소된다.

패는 다 이긴 바둑을 비세(非勢)로 만들거나,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된 판세를 기사회생(起死回生)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패를 바둑판에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키는 요술쟁이라고도 한다. 군자는 패를 싫어한다고 한다. 바둑도 입신(入神.9단)의 경지에 오르면 돌의 흐름도 상선약수(上善若水)요, 마음도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두가 군자는 아닐 터이다. 그래서 ‘용패(用覇)’도 한다. 그냥 두면 무난하게 질 바둑 판세를 뒤흔들기 위해 일부러 불리한 패를 쓰는 것이다. 일견 ‘꼼수’로도 보이지만, 밑져 봐야 본전이라면 마지막으로 건곤일척(乾坤一擲) 승부수를 던지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어차피 상대가 있는 게임이 아닌가. 고도의 심리전도 필요하다.

‘용패’는 본디 무리수다. 평범하게 정수(正手)로 받으면 그만이다. 무리한 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에 집 차이만 커진다. 그런데 찰나의 미묘한 감정이 강물처럼 흐르던 바둑판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네가 감히 어딜. 이 참에 본때를 보여줘야지”하고 욱하는 순간 구름이 몰려들고 뽀얀 흙먼지가 이는 것이다.

반대로 ‘꽃놀이 패’도 있다. 한국 근대 바둑의 문을 연 조남철 국수가 만든 용어로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 봄날에 꽃구경 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대하는 패이다. 이기면 당연히 좋지만, 져도 손해를 보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용패를 하는 쪽에서 쓰는 패감에는 독(毒)이 묻어 있다. 자칫 잘못 받았다가는 다 지은 밥에 코를 빠뜨리는 꼴이 된다. 손해를 무릅쓰고 이어가는 패인데, 훤히 보이는 패감을 쓰겠는가. 물론 꽃놀이 패를 당하는 쪽은 이겨도 그다지 이득이 없는데, 지면 큰일이니 패감을 쓰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늘어진 패도 쫓아가는 처지에선 답답할 지경이다. 당장은 아니나 언젠가 수가 줄어들면 단패(單覇)가 된다. 이 때를 대비해 패감을 아끼고 쌓아두어야 한다. 반면에 ‘천지대패(天地大覇)’는 승부를 가르는 패여서 아낌없이 패감을 쏟아 부어야 한다. 그것도 상대가 외면할 수 없는 크고 묵직한 패감이라야 한다. 자칫 패감 크기를 잘못 계산하거나, 패감 자체가 모자라면 그것으로 승부는 끝이다.

검찰 vs 홍준표 지사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림 홍 지사 측근을 잇따라 소환 조사하고 있다. 성 전 회장 수사와 관련 홍 지사는 “소나기가 그치면 해가 뜬다. 무지개도 뜬다”고 밝혔지만, 소나기가 그쳤는데 캄캄한 그믐밤이고, 비 온 후에 땅이 더 질척거릴 수 있다. / 더팩트 DB

이 승부를 가르는 천지대패(天地大覇)는 만패불청(萬覇不聽)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어떠한 패감에도 응수(應手)를 하지 않고 패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제 상대는 조용히 돌을 던지는 일만 남았다는 선언이다.

이처럼 바둑판을 휘젓는 것이 패(覇)여서 고수(高手)는 항상 패감을 비축(備蓄)한다. 바둑판 속담에 “고수(高手)는 패감을 아끼다 판을 망치고, 하수(下手)는 패감을 없애서 판을 망친다”는 말이 있다. 고수는 가능성을 열어 두는데 비해 하수들은 무심코 ‘보리 선수(先手)’를 두어 돌들의 추후 활용 가능성을 없앴다. ‘보리 선수’는 선수이기는 한데 굳이 지금 두지 않아도 되는 선수로서 당장 급한 곳에 두는 ‘찹쌀 선수(先手)’의 상대 개념이다.

정국을 뒤흔들던 ‘성완종 리스트’도 재보궐 선거가 끝나자 조금 김이 빠지는 형국이다. 그래도 집권세력과 사정당국은 ‘몸통’은 몰라도 ‘꼬리’는 어느 정도 잘라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홍준표 경남지사가 사정권(射程圈)에 든 것으로 보인다. 역시 검사가 검사를 알고, 정치인이 정치를 안다. 홍준표 지사야말로 ‘모래시계 검사’에 여당 대표까지 지내지 않았나.

그런 그가 SNS에 한마디 했다. “이번에는 패감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궁지(窮地)에 몰린 처지에서 “나도 물 수 있거든”하며 이빨을 드러냈다고나 할까. 그런데 홍 지사가 패감이 되느냐 마느냐는 그 자신의 ‘크기’도 감안해야 할 요소이겠지만, 무엇보다 이 패가 집권세력에게 ‘용패’인지 ‘꽃놀이 패’인지 ‘천지대패’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반전을 노리는 ‘용패’라면 독이 묻은 패감으로 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거도 끝난 마당에 정국(政局)을 관망(觀望)하며 ‘꽃놀이 패’ 정도로 인식한다면 굳이 패감을 쓰지 않고 딴청을 할 수도 있다. 권력의 향배(向背)를 가르는 천지대패(天地大覇)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 경우는 어디 홍 지사뿐이겠나. 수족을 자르고 몸통까지 사석(捨石)으로 버리더라도, 구차하게 ‘구구도생(圖生)’하더라도 이 패(覇)만 이긴다면 그것으로 승자독식(勝者獨食)인데 말이다.

홍 지사는 “소나기가 그치면 해가 뜬다. 무지개도 뜬다”고 덧붙였다. 그럴 수 있다. 비 온 후에 땅이 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나기가 그쳤는데 캄캄한 그믐밤이고, 비 온 후에 땅이 더 질척거릴 수 있다.

공자가 말했다. 어진 사람은 재물로 몸을 일으키지만, 어질지 않은 사람은 몸을 망쳐 재물을 일으킨다((仁者 以財發身, 不仁者 以身發財)고. 온공(溫公)도 말했다. 스스로 큰 뜻을 품었다면 “예(禮)로써 정치를 세우고 인(仁)으로 백성을 품으라(立政以禮,懷民以仁)”고. 그러면 “그를 건드리는 자는 부서지고, 범하는 자는 타버릴 것(觸之者碎, 犯之者焦)”이라고(통감절요.김정화 역주). 결국 패감으로 쓰이느냐, 소나기가 그치고 해와 무지개가 뜨느냐는 본인 스스로에게 답(答)이 있다.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sseoul@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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