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성현을 찬양하는 것은 쉽다. 공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 역시 어렵지만, 공자님을 떠받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 않은가. 예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의 가르침을 진정 이해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은 무척 힘들다.
원수를 갚기도 힘든데, 사랑하라니. 어디 될 법이나 한 얘기인가.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까지 내밀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냔 말이다. 그 대신 찬송은 OK, 기도는 돈도 벌고 건강도 지켜주고 성공도 이뤄줄 텐데,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이번 주(3월30일~4월4일)가 기독교의 ‘고난주간’이다. 예수가 유대교 대제사장에게 고발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처형되는 기간이다. 고난주간의 마지막은 예수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부활절(4월5일)이다. 묘하게도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과 겹쳐 마치 정교하게 짜인 ‘모순적 중의(重義)’로도 느껴진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유월절은 모세의 ‘출애굽기’가 기원이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의 신 야훼가 자신이 선택한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에 10가지 재앙을 내리는데, 마지막 재앙이 사람과 가축의 모든 첫째(장자)의 죽음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에 따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의 사자를 피했다. 유월(逾越)은 (죽음을)지나친다는 뜻으로, 영어로 패스오버(Passover)다. 유대인들은 파라오의 복수를 피해 서둘러 떠나느라 발효하지 않은 빵 무교병(無酵餠)을 준비한다. 발효시키려면 12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자칫 갈라진 홍해를 건너지 못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유월절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이라면, 부활절은 실락원(失樂園)에서 시작된 원죄로부터 해방이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살벌한 유대교 율법으로부터 해방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 유대인 예수를 처형했는데, 예수는 유대의 전통과 그리스•로마문명에서 숙성되면서 전 세계인의 가슴 속에 부활한다. 영어로는 이스터(Easter)인데, 튜턴족(族)의 봄의 여신(Eostr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질곡의 겨울이 끝나고, 신상의 세상에 봄이 왔다는 뜻일까. 부활절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했는데, 춘분(3월21일)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뜬 다음 일요일이다. 보통 3월22일~4월26일 사이다.
그런데 왜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을까. 그리고 부활의 정체는 뭔가. 아마도 관련 서적과 학술논문만 모아도 국립중앙도서관 분량만큼 되지 않을까. 여기서는 ‘술자리 인문학’에 걸맞게 주석(酒席)에서 주석(註釋)을 붙여보자.
과연 누가 왜 예수를 죽였나. 미국 내 유대교도들이 불편해하는 사실이지만, 당시의 주류 세력인 유대교 제사장들과 그 추종세력이 빌라도의 손을 빌어 차도살인(借刀殺人)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수와 예수에게 세례를 해주었던 요한을 따르는 민중들이 적잖은 상황에서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을 살짝 비낀 것이다.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던 빌라도였지만, 질서유지를 위해 희생양으로 바치고 만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처형해야 했을까.
바로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예수의 기적이 40여가지가 있다고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과 ‘치유(治癒)의 기적’이다. 오병이어는 말 그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갈릴리 호반에 모인 5천여 군중을 먹였다는 것이다. 이를 종교적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보면, 당시는 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마련하고 나눠먹지는 않았다. 부자들은 도시락을 충분히 챙겨 음식이 남아돌아도 가난한 자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예수가 한 아이가 가져온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놓고 축사한다. 이에 너도나도 가져온 먹거리를 펼쳐놓자 모두 먹고도 오히려 남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회도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었는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 같다며 주창한 ‘더불어 사는 사회’, 즉 ‘경제민주화’를 내세웠던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主祈禱文)을 가르쳐주는데,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길 바라며 첫 번째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굶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것이며, 매일 굶지 않고 먹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며 개인의 팔자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방법은 두 가지이다. 나라가 세금을 ‘부익다 빈익소(富益多 貧益少)’로 잘 거두어 ‘전 국민 무상급식’을 하든지, 민중이 앞장서 빈민과 소외계층을 구제하는 ‘어깨동무 사회’를 구현하든지. 결국 ‘성장이냐, 분배냐’가 아니라, ‘성장 후 분배냐, 분배와 함께 성장이냐’가 아닌가. 결국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가 핵심이다.
MB정권은 ‘낙수효과(Trickle down)’, 즉 대기업 성장을 촉진하면 중소기업도 나아진다며 대기업을 부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물을 넘쳐서 바닥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사내유보라는 대형 저수지에 담겨 바닥은 가뭄에 바싹 말라버린 형국이 아닌가. “부자 되세요~”란 천박한 구호마저 부자, 기득권에 외친 것이다. 이에 서민들이 들끓자 현 정권은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며 집권에 성공한다. 하지만 공약(公約)은 이미 공약(空約)이 돼버렸다. 그리고는 한 지방자치단체장이 학생들 무상급식까지 당당하게 폐지하는 상황이다.
밥을 함께 먹을 것인가, 따로 먹을 것인가. 부자는 토하면서 먹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사실상의 구걸을 강요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 문제로 예수는 기득권의 불만을 사는 것이다. “성전에서 장사를 못하게 하다니,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못하게 하다니, 그러면 결국 제사장 일족과 추종세력의 기득권은 미약해지지나 않을까. 혹시나 민중들이 예수의 말에 고취돼 집단행동에 나서면 어쩌지.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세력이니 보안법을 적용해야지. 먼저 이들의 수괴인 예수부터 처단해야지.”
주기도문의 두 번째는 ‘용서를 통한 화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면한 것처럼 우리의 죄도 사면해 달라”는 것이다. 나의 왼쪽 뺨을 때린 원수에게 오른쪽 뺨을 내밀었으므로, 이제 원수를 사랑하기로 했으므로, 혹여 부지불식간에 내가 괴롭히거나 상처를 준 사람도 나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이렇게 선제적인 용서를 통해 원수와도 ‘화해’를 이뤘을 때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 것 아니겠나.
이에 앞서 예수는 갖가지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나환자다. 당시 나환자는 신체적 질병이자 종교적 형벌로 여겨졌다. 따라서 불가촉민(不可觸民)이었다. 이런 나환자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만졌으니, 시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어 혈루병을 앓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질 않나, 간음한 여자를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질 않나, 미친(당시로서는 마귀에 들린) 사람을 위로하질 않나… 한마디로 사회적 소수이자 소외된 자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 제사장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낫다는 '망발'까지. 그야말로 계급타파이자 계급 화해인 셈으로, 요즘으로 치면 유럽 사회주의의 지향점과 비슷하다. 그러니 기득권층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먹는 것을 중요시하고 사회적 소수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표현을 달리하면 경제민주화와 보편사회, 사회 대화합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처형된 것이다.
그러면 요즘은 어떤가.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예수가 ‘밥’과 ‘화해’를 강조하던 시절보다 나아졌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구했지만, ‘오병이어 기적’으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으면 먹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지만, 아직도 굶주리며 경제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쫓기지 않나. “가난을 증명해야, 사실상 구걸해야 밥을 주겠다”는 정책을 그나마 고마워해야 하나.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고는, 내 편이 아니면 적(敵)이거나 원수라는 이분법은 여전하지 않는가. 지역마저 동서(東西)로 또 이리저리 나누어 서로 사갈시(蛇蝎視)하면서 남북(南北)의 통일을 말하는 것은 주문(呪文)인지 기도문(祈禱文)인지 헷갈린다.
부활절을 맞이해 전국의 교회들은 포도주와 떡을 준비할 것이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요, 떡은 살을 상징한다. 이를 먹고 마시며 예수님이 부활한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부활절을 즈음해 ‘국가조찬기도회’를 연다. 올해도 지난 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작고한 김준곤 목사가 아이디어를 내고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수용하면서 1965년2월27일 옛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이듬해 ‘대통령조찬기도회’로 이름이 바뀌고 1968년에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로 공식화된다. 김준곤 목사는 설교를 통해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하나님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는 기독교도들의 염원과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묘하게 오버랩 된다.
이번 47회 국가조찬기도회에 당연히(?)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제목은 ‘통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었다. 문득 ‘통일 대박’이 떠오르는데, 항간에선 ‘통일 대박’이 엄청난 잭팟이란 뜻이 아니라 ‘통일 대(통령)박(근혜)’라고도 한다. 그런 의미로 보면 ‘하나님’과 ‘대(통령)박(근혜)’가 묘하게 오버랩 된다.
그래서일까. 송기춘 한국공법학회장은 2012년 ‘국가조찬기도회의 헌법적 문제’를 헌법학연구(제18권제1호)에서 제기한다. “독재시기에 대통령을 위한 기도회로 출발하여 정치권력을 종교가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종교단체가 국가권력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로로 잡고 있다는 점, 대통령 입장행사와 대통령을 위한 기도 등 특정 공직자를 위한 기도회로 기획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 달리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정교일치’로 보기는 좀 힘든 것 같다.
여하튼 올해도 부활절이 찾아오는데, 과연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축원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신자들이야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를 기념하고 축하하며,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기를” 축원하면 될까. 모두에서 말했지만,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은 쉽다. 이번 기회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 어떨까.
바로 ‘밥’과 ‘화해’ 말이다. 일용할 양식을 나눠먹는 ‘경제민주화’,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대화합’이 예수 정신이 아닌가. 예수님의 손끝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이는 비단 신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구성원 대다수의 염원이 아닌가. 따라서 이번 부활절에는 박정희 정신보다 예수 정신의 부활을 기대한다. ‘밥(경제민주화)’과 ‘화해(사회대화합)’ 말이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