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IS를 두고 충격과 공포와 분노와 자성이 교차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테러집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테러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국가를 세우려 한다. 바로 ‘이슬람국가(The Islamic State)’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21세기판 ‘신정(神政)국가’가 목표인 것으로 비치는데, 실제로는 알 카에다의 연장선에서 ‘종교(수니파)적 내전’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목표에 접근하는 방법론도 종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온라인(인터넷)으로 지지자를 모아서 오프라인(전쟁터)으로 보낸다. 남녀노소는 물론, 인종과 국적도 불문이다. 그런가 하면 종교와 정치가 혼합되고, 테러와 전쟁양상이 어지럽게 오가며 그 경계도 모호하다. 경계가 무너진 현 시대의 어두운 단면이다.
그러면 IS를 움직이는 동력원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분노’라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사람들은 슬프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저 처지를 한탄할 뿐이다. 그러나 분노하게 되면 ‘변화’를 일으킨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맬컴 엑스(Malcolm X, 1925~1965)의 진단이다. 자신의 혈관에 흐르는 백인의 피 한 방울까지 저주했던 그다. 순전히 까맣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서 인간적으로, 성적으로 학대 당한 ‘뿌리’의 처지와 이후의 상황에 분노한 것이다.
현재 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별명. 원래 이름은 이브라힘 이븐 아와드 이븐 이브라힘 이븐 알리 이븐 무하마드 알-바드리 알-사마라이)도 처음에는 이라크와 자신의 처지를 슬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2005년 점령군이 미군에 체포돼 부카 기지에 구금됐을 때만 해도 그저 그런 내성적인 지식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9년 풀려났을 때, 그는 이미 전사(戰士)로 거듭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것이다.
구금기간 중 당한 고문과 학대와 인간으로서의 모멸감은 슬픔을 넘어 분노가 온몸에 충만케 했을 것이다. 다구나 그 안에서 만난 실질적 테러리스트와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까지 형성됐다. 그는 2010년 이슬람교 수니파 지하디스트인 ‘이라크 이슬람 국가’에 가담했고, 2011년에는 미국의 현상수배자 명단에 오른다. 현상금은 생사에 관계없이 1천만 달러다. 바로 그가 IS의 칼리프로 자칭하고 있는 장본인이다. 칼리프는 계승자·대리자란 뜻인데, 이슬람 국가의 최고 권위자를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미국 입장에서 보면 폭력(고문)이 폭력(테러)의 씨앗을 뿌렸고, 그 씨앗이 자라서 화근(禍根)이 된 셈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부시 대통령이 벌였던 ‘악의 축’과의 전쟁이 표면상 끝났으면서도 사실상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형국인 것이다. 마치 졸업을 뜻하는 영어 표현이 시작(Commencement)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는 본디 적대적인가. 유일신 야훼(여호와)와 알라는 서로 경쟁적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차양자동 출이이명(此兩者同 出而異名)’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에서 도(道)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오는 말을 잠깐 빌었는데, 유대교의 야훼(YHWH)와 기독교의 여호와(Jehovah), 이슬람의 알라(Allah)가 모두 같은 ‘하나님’이다. 그냥 뜻만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실제 종교적 뿌리까지도 같다. 이슬람 경전인 꾸란에는 아브라함과 모세, 예수도 나온다.
꾸란은 예수의 탄생도 기록하고 있는데, 동정녀 마리암(마리아)이 알라의 뜻에 따라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홀로 예수를 낳는다. 알라는 이때 사막 한가운데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해 마리암의 목을 축여준다고 서술한다. 기독교의 신약성서와 다른 점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등장하지 않고, 홀로 잉태하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기적도 신약성서와 거의 똑같이 기술돼 있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여 군중을 먹였다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소경을 눈뜨게 하고, 나환자를 치료하며,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일화까지 말이다.
무함마드의 기적은 단 하나, ‘이산(離山)의 기적’이다. 제자들이 무함마드에게 예수처럼 기적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그러면 신의 대리인임을 믿겠다면서. 이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고 타이르던 무함마드가 결국 보채는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선다. 산을 옮겨 보이겠다며 “산아, 내게로 오라”고 외친다. 그럼에도 산이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자 “그렇다면 내가 가겠다”며 산을 향해 걸어간다.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무함마드의 기적’이다. 이것이 무슨 기적이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반면 예수의 ‘믿기 힘든’ 수많은 기적보다 이 단순해 보이는 ‘이산의 기적’에 감동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이슬람은 이처럼 예수(꾸란에서는 Isa로 표현한다)의 동정녀 탄생과 각종 기적 행위를 인정하지만, 그것은 삼위일체 신(神)으로서가 아니라 유일신 알라의 권능을 대신해 기적을 행한 예언자이자 선지자로 보는 것이다. 이슬람에는 5대 선지자(메신저)가 있는데, 노아-아브라함-모세-예수-무함마드로 이어진다. 무함마드는 마지막 선지자이며, 알라만이 유일신이고, 따라서 예수는 무함마드에 앞서 진리를 선포한 강력한 신의 사자(使者)라는 것이다.
반면 유대교에서 예수는 신의 아들이기는커녕 배교자(背敎者)일 뿐이다. 모세로부터 이어져 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지키지 않고 새로운 계명 ‘원수를 사랑하라’고 선동하면서,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성전을 제멋대로 정리하는 기성 체제에 거스르는 불온한 ‘랍비’인 것이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살려주려 하지만, 끝까지 십자가에 못박도록 종용한 이들이 바로 유대인 제사장이다.
기독교는 모두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자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성부-성자-성신 삼위일체의 한 축이다.
이처럼 한 뿌리에서 성장하고 갈라진 종교인데, 현재의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정국(政局)을 보면, 마치 유대교와 기독교가 함께 이슬람을 핍박하는 형국으로도 비친다. 삼국지에서 조조의 아들 조식이 형 조비의 핍박을 받으며 지은 칠보시(七步詩)의 한 대목, ‘본래 한 뿌리에서 났는데, 어찌 이리도 급하게 들볶는가(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를 생각케 한다.
그런데 종교적 갈등 구조로 보면 ‘이슬람 vs 기독교+유대교’의 구도는 좀 이상하게 보인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신으로서든 선지자로서든 여하튼 예수를 인정하는데, 유대교에서는 배교자이지 않은가. 또 이름만 다른 여호와와 알라는 모든 인류에게 똑같이 은총을 베푼다고 여기지만, 유대교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과 선택적으로 계약했다고 믿는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2000년을 유랑하던 유대인이, 유럽인들의 핍박과 천대를 견뎌내고,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이후 겹겹이 에워싼 아랍국가 속에서 민족차별적 선민의식을 버리지 않고도 굳건하게 버티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얼마 전 러시아 공산당과 소비에트연방 창설자인 레닌이 유대계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활발하다. 구 소련의 경우 ‘자본론’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유대인이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스탈린 최대의 정적으로 ‘대권’을 놓고 각축했던 트로츠키도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레닌도 알고 보니 외할아버지가 유대인이란다. 결국 유대인들이 공산주의 이론은 물론 ‘붉은 혁명’을 통해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유대인의 영향력이 지대하다. ‘자본론’이 동(東)쪽 진영을 지배했다면, ‘자본주의’가 서(西)쪽 진영을 주도한 셈이다. 혹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유대인을 위한, 유대인에 의한, 유대인의 시대라고도 촌평하는데 여기에는 ‘자본’에 대한 집단적 특성도 작용한 것이 아닐까. 나라를 잃고 유랑하던 민족으로서 자본의 속성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유대인이 아니던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등장한 샤일록이 바로 유대인이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 유대인이 기피대상이 된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본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아니라 유대인 제사장들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는 생각이다. 성경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겠다며 풀어주려 하지만, 제사장들은 차라리 흉악범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친다. 영화배우이자 제작자인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제작할 때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등 할리우드의 유대계 실력자들이 직간접으로 방해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도들이 신약 외에도 구약(토라)을 탐독하며 야훼의 자녀임을 외치는 데 굳이 냉소를 흘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멜 깁슨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 대신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핍박을 받으사…’로 여기게끔 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을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이스라엘은 세계 무대에서 사실상 미국을 제외하면 고립무원인데,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자칫 반 유대 감정이라도 생긴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여하튼 20세기 초 미국으로 몰려든 유대인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새롭게 ‘약속의 땅’을 건설한다. 마치 마르크스나 트로츠키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듯이. 이들은 맨주먹으로 건너와 미국이란 사회에 신경처럼 뻗어간다. 무엇보다 천부적 재능을 가진 돈이 큰 무기다. 오랜 세월 유랑에서 체득한 본능은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경계심을 보인다. 그저 돈으로 제어하면 되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의 그린스펀이 유대인이고, 월가(街)를 비롯한 미국 금융시장을 유대인이 완전히 장악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유대인들의 결혼식이나 성인식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럴 만한 것이 뉴욕 인구의 30% 이상이 유대인이다. 세계무역은행을 파괴한 9.11 만행에 사우디의 한 왕자가 “미국이 아니라 유대 자본의 심장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해 구설에 오르기도 한 바탕이다.
미국의 현재를 파악할 때도 유대인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몇 해 전 오바마 대통령도 사뭇 용감하게 ‘팔레스타인에는 땅을, 이스라엘에는 평화를’이라고 주장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상과 현실을 다르다. 특히 선민의식이 뿌리 박혀 인종차별국가로 거론되는 유대국가에 ‘바리새인’들과 공존공영이 가능할까. 바로 그 경계선이 구약과 신약을 가른다. 신약은 야훼가 세계만민의 하나님으로 선언하지만, 구약에서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인 것이다.
물론 유대인의 입장에서 돈과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학문과 예술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중학교 국어교과서의 표지는 사전의 일부를 찢어 붙인 것 같은 디자인이다. 찢어진 사전에 나타난 표제자가 ‘rabbi(랍비)’다. 유대 율법학자인데, 선생님으로 설명돼 있다. 유명한 학자들도 많이 배출하면서 일반인들은 자연스레 유대인이 유능하고 똑똑하다고 여기게 된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 대학교들은 공부의 힘으로 몰려드는 유대인들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다트머스 대학부터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다. 성적 외에 스포츠, 예능, 봉사활동 등 다면평가로 선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인을 배척하고 ‘WASP(화이트 앵글로색슨 퓨리턴)’를 더 뽑기 위한 꾀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날 유대인이 아니다. 더욱 억척스럽게 자녀 교육에 매달려 돈을 버는 대로 자녀가 스포츠와 예술, 그리고 사회봉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 결과 지금은 미국 내 2%에 불과한 유대계가 아이비리그 학생의 20%를 차지한다. 아이비리그 교수의 60%가 유대인이며, 뉴욕과 워싱턴의 변호사 40%가 유대인이다. WASP가 만든 아이비리그 특별전형(Legacy) 입학은 이제 유대인의 손쉬운 통과증명서가 됐다.
영화 ‘이글아이’에서 샤이어 라보프가 주연을 맡았을 때 미국에서도 ‘누구지…’했겠지만, 유대계란 수식어에 ‘그렇군…’했을 것이다. 지금은 트랜스포머 시리즈로 스타덤에 올라 있다. 할리우드는 이미 유대계가 주류다. 스필버그도, 루카스도, 워쇼스키도 유대계다.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를 보며 찬탄하고 있노라면 ‘네오(Neo)’란 이름의 ‘더 원(The One)’과 인류생존 최후의 보루 ‘시온(Zion)’을 엮어내는 그들의 정교한 의식화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영화의 설정이지만 유배당한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울며 그리던 곳이 ‘시온(Zion)’이다. 노래도 있다. ‘바빌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떠올리며 흐느낀다(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영화를 보며, 바이러스군단에 의해 멸절위기에 처한 시온을 Neo(영어로 New라는 뜻이며,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가 구하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신약은 ‘허구’이지만, ‘네오(Neo)’가 ‘시온(Zion)’을 구하는 것으로 상정해 뜨거운 여운과 함께 박수를 유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00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잘 나가던 홈 드라마에 ‘일곱 번째 천국(7th Heaven)’이 있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목사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성장드라마다. 목사 부인이 현실에서 임신을 하자 극에서도 임신한 것으로 나오고,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아역 배우가 된다. 그들이 커가면서 겪는 일화를 통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전형적인 미국 중류층을 겨냥한 드라마다.
그런데 9.11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시퀀스가 등장한다. 주인공 목사 아들이 유대교 랍비 딸과 사귀게 되는 것이다. 육감적인 여배우 제시카 비엘이다. 짐작할 수 있듯이, 그 해 시즌의 피날레는 이들의 결혼장면이었다. 목사와 랍비가 공동주례로 토라와 구약을 서로 교독하며 결혼식을 이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혼인 것이다. 이를 보는 많은 미국내 기독교인들은 ‘그래, 기독교가 남편이라면 유대교는 부인이겠지. 어차피 기독교는 유대교가 모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친 유대 정서는 친 이스라엘 지지성향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물론 작가는 유대계였다.
미국에서 상수리나무(Oak)란 이름이 들어간 지역에는 거의 예외 없이 유대인 밀집지역이 있다. 상수리나무는 구약에서 ‘약속의 나무’다. 아브라함이 바빌론의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하면서 어떻게 그 곳인지 알 수 있느냐고 묻자 야훼가 큰 상수리나무를 보면 바로 그 곳이라고 계시한다. 캘리포니아에는 지중해식 기후가 종종 나타나는데, 그래서 상수리나무도 많다. 대표적인 도시가 ‘사우전드 오크스(Thousand Oaks)’’오크 파크(Oak Park)’ 등인데, 상수리나무가 1000그루나 있고, 상수리나무로 공원을 이뤘다니 유대인들은 얼마나 가슴이 설레겠나. 실제 이들 도시는 주민의 절반 이상이 유대인이다. 외지인에게 이 동네의 12월은 매우 이상하게 느껴진다. 산타클로스도, 루돌프 사슴도,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다. 썰~렁하다. 그때서야 ‘아, 이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배교자일 뿐이지’하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미국 이전에도 세계사의 변곡점에 항상 유대인이 있었다는 ‘유머’가 있다. ‘세계사를 바꾼 5인의 유대인’인데, 미국인들이 즐기는 유머이다. 첫째가 모세다. 그가 석판 두 개를 양 손에 들고 외친다. “Law is everything(법이 모든 것이다)!” 둘째는 예수다. 십자가에 못박히며 말한다. “Love is everything(본질적으로, 사랑이다)!” 셋째는 프로이트다. 꿈의 해석을 펼치며 말한다. “Sex is everything(본능적으로, 섹스다)!” 넷째는 마르크스. 자본론을 덮으며 말한다. “Money is everything(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다섯째는 아인슈타인이다. E=MC²을 쓰곤 말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Everything is relative)!” 바로 상대성이론이다.
그런데 최근 여섯째 인물군(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구동성 “IT is everything(모든 것은 IT로 통한다)!” 또는 ”IT is it(IT가 모든 것)!”이라고 한다. 구글(Google)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페이스북(Facebook)의 마크 저커버그, 페이팔(PayPal)의 공동창업자인 앨런 머스크가 모두 유대인이다.
1901년부터 시작된 노벨상 수상자의 23%가 유대인이다. 전세계 1600만명 안팎으로 우리의 3분의1에 불과한데, 수상자가 180명을 넘었다. 왜 이처럼 유대인은 똑똑한가. 원래 두뇌가 좋은가, 교육열 때문인가. 여기에 재미있는 분석이 있다. 유대인이 유럽인보다 머리가 좋은 이유는 결과적 ‘우생학’이란다. 중세 이전부터 똑똑한 유대인은 랍비가 됐고, 똑똑한 유럽인은 신부, 수도사, 수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랍비는 결혼하며, 아이도 많이 낳는데 신부나 수녀는 전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과 유럽인의 두뇌능력 격차가 커졌다는 것인데, 우스개로 치부하기에는 관련 논문이 제법 많은 편이다.
우리가 보는 빛은 본디 그 물체가 가장 싫어하는 빛이다. 붉은 장미의 붉은 색깔은 장미가 모든 색깔을 흡수하고는 가장 싫어하는 색을 반사해버린 것이다. 장미가 싫어서 반사한 붉은 색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경탄한다. 아이러니컬하지 아니한가. 어쩌면 우리가 보는 모든 현상도 실제와는 다를 수 있다.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