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이 뉘 땅인데.'
60여년 전, 울릉도 청년들은 외쳤다. 누가 시킨 것도,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독도는 우리 땅'이기에, 그래서 지켰다. 주머니를 털어 무인도에 둥지를 틀었고, 일본에 저항했으며, '한국령(韓國領)' 세 글자를 새겼다. 이들은 '독도의용수비대'다.
1950년대 초반 독도수비대는 독도를 지킨 후 경찰에 임무를 인계했다. 청춘을 바친 독도를 떠난 뒤 그들에게 남은 건 가난이었다. 일부는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했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정부는 1996년 4월 고 홍순칠 대장에게 보국훈장 삼일장을, 나머지 대원에게 보국훈장 광복장을 수여했다. 하지만 '독도수비대'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25명이 세상을 떠났고, 아직 8명이 그날을 가슴에 품고 있다.
2월 22일은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 독도)의 날' 10주년이다. 세월이 무수히 흘렀건만 독도를 둘러싼 논쟁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맘때쯤이면 홍 대장의 아내 박영희 여사(85)는 세월이 원통하다. 홍 대장은 1986년 2월(55세) 척추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더팩트>는 지난 13일 경북 청도 자택에서 박 여사를 직접 만나 역사 속 '독도'를 되새겼다.
◆ "동지, 우리 함께 독도를 지켜 보자"
-독도를 지키겠다고 나선 홍 대장님, 그때 나이가 몇 살이었나요.
스물 네살이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였지. 홍 대장이 울릉도 사람이라. 울릉도에 사람이 안 살던 때 그곳을 개척했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지. 할아버지가 농사도 하고, 어업도 하며 독도를 자주 왔다갔다 했어.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물개를 수없이 잡아가는 거야. 일본 총리한테 진정서를 올렸어. '우리 허락 없이 물개를 잡아가지 말라고.' 그런데 일제치하 때라 들어주겠나. 할아버지가 한이 맺혔지. 정부가 힘이 없으니.
-홍 대장께서 독도수비대를 조직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를 보면서 홍 대장은 독도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나 봐. 기갑부대의 특무상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포격을 맞고 상이용사로 돌아온 다음 바로 독도수비대를 꾸릴 생각을 한 것 같아. 남북 전쟁을 할 동안 독도는 관심이 없잖아. 사람이 안 사니 일본이 그 틈을 타서 자꾸 노리고 들어오는 거라. 독도 점령 푯말을 붙이고. 내가 대구 사람인데 1952년 결혼해서 울릉도에 가보니 준비를 다 해놨더라고. 홍 대장이 상이군인(전투에서 다친 군인) 회장이었거든? 상이군인들한테 자금을 내가 댈테니 우리가 (독도를) 지켜 보자라고 설득했어. "이 문전옥답에 참새가 날아들어도 쫓아야 되거늘 화적떼 같은 일본 놈들이 독도를 침범하는 걸 어찌 바다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야 되겠습니까"라면서.
◆ "주머니 털어 대원 모집하고, 무기 구매"
-당시 한국전쟁 직후라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텐데,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당시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300만 원을 털어서 자금을 마련했지. 돈만 있다고 다 되나. 일본에 대적하려면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고선 안되지. 홍 대장이 돈을 갖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천막, 침낭, 식사도구, 등을 사왔어. 당시 국제시장엔 없는 게 없었어. 돈 만 있으면 다 살 수 있어. 석유 부어서 불 밝히는 등 밑에 'U.S.A'라고 딱 써 있더라. 하하. 또 불법이라도 독도를 지키려면 무기가 있어야지. 맨몸으론 못가니 무기랑 군복, 군화, 모자 등 다 사왔더라. 군복도 싸게 산다고 단추도 안 달고 바짓가랑이도 길고, 미완성품을 사왔어. 홍 대장이 나보고 재봉틀질하라고 해서 완성했어.
-대원을 모집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홍 대장께서 징집영장을 발부했다고 들었습니다.
독도에서 싸우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오라고 하면 안 올일 아닌가. 후방부대에서 길도 닦아야했고. 정부에서 안 지켜주는데 누구라도 그렇게 해야 했다.
◆ 일본과 총격전, 암벽에 '한국령' 새겨
-독도수비대는 처음부터 33명이었나요? 언제 독도에 들어갔나요.
1953년 4월 19일 우리 집에 홍 대장을 포함해 상이군인 6명이 모였어. 군장을 갖추고 밤 12시에 배를 타고 출발했어. 독도의 상황을 살펴야 했으니까. 수비대는 독도의 서도에 안착을 했어. 동도는 가팔랐거든. 서도에는 물굴도 있고, 거기에 천막을 쳤지. 머무르면서 풍향과 날씨 등을 기록했지. 문제는 동도였어. 여기가 일본 배가 오는 것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곳이니까. 길을 닦아야하니 대원을 더 모집했지. 독도에 머무는 전방부대 1·2소대 10명 씩 20명, 섬 밖에서 물자 등을 지원하는 후방부대 13명. 처음엔 후방부대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 누가 돈을 주나 먹을 것을 주나, 중간에 다 빠져나갔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
-독도수비대는 실제 일본과 총격전도 벌였다면서요.
자체 구입한 무기와 울릉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받은 박격포, 증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독도를 지켰지. 또 독도에 대한 우리나라의 영유권을 확실히 하고자 독도 근해에서 조업 중인 울릉도 주민을 보호하고 독도에 무단 상륙한 일본인 축출 및 일본이 불법적으로 설치한 영토표지를 철거했어. 일본 순시선과 여러 차례 총격전도 벌였지.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위장 대포'를 만들어 물리치기도 했고, 동도 암벽에 '한국령'이라고 새기고 독도수비의 결의를 다졌지.
◆ "독도 지키느라 길바닥에 나앉아"
-독도를 경찰에 인계하고 떠난 뒤 삶은 어떠셨나요.
홍 대장이 (독도를 지키느라) 재산을 다 써버리니 애들 공부시킬 수도 없고, 집도 없고 길바닥에 나앉게 됐어. 내가 대구 사람인데 사범학교를 나왔거든. 형편이 어려워서 1965년부터 한 5년 동안 초등학교 선생님을 해서 식구들 밥은 겨우 먹었어. 그런데 애들 공부시킬 일이 막막하더라. '큰일났다' 싶었다. 내가 사는 게 이런데 애들 고생시키는 게 너무 미안해서. 홍 대장은 왜 안 괴롭겠나. 나한테 말은 못하고. 그 뒤로 내가 사표를 냈다. ' 뭔가 변화가 있어야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아들을 등에 업고 동네 이곳저곳 집을 구하려니 돈이 많이 들어. 하꼬방(판잣집)을 지어야겠다 마음 먹고 울릉도 항구 바로 옆에 한 다섯평 정도 무허가 건물을 지었어. 콩을 갈아서 계란을 넣고 두유를 만들었는데 대인기였다. 그때 당시 한 대접에 50원씩 팔았나. 한 2년 반 동안 무허가 건물에서 장사를 했다. 하꼬방에서 애들 대학 보내고, 그땐 다 그랬지…. 먹고 살기 힘든 세월이었으니.
-독도를 지킨 공로를 나라에서 인정했나요.
큰 딸이 나라에 편지라고 해야 하나? 진정서를 넣었어.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독도수비대가 1953년부터 1956년 3년 8개월 동안 독도를 자비로 지켰다'고. 그랬더니 김영삼 대통령이 당장에 연락 왔더라. '독도의용수비대라고 있나?'라고 물어서 '있다'고 했고, 관련 문서와 대원들의 공적사항을 다 해서 올렸어. 그래서 33명이 1996년도에 나라에서 보국훈장을 받았어.
-결국 향년 55세에 척추암으로 돌아가셨다. 정부를 원망하지 않습니까.
1986년 2월에 돌아가셨지. 생각을 안 하려고 했는데…. 내 돈 들여 누가 지키라 했나. 자발적으로 독도를 지켰더니 결과는…. 그런데도 우리 애들은 자기 아버지 존경한다.
-그래도 시절이 지나 독도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정부에 바라거나 국민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늦었지만 정부에서 국가유공자로 지정도 해줬고, 여한은 없다. 다만 얼마 전에도 얼마를 들여 독도입도지원센터를 건립한다고 해놓고 취소하지 않았나.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니 일본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겠나. 돈이 부족하면 한 해는 얼마, 또 한 해는 얼마씩 장기적으로 모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애들도 교육 시켜야 하지 않겠나.
[더팩트 ㅣ 청도=오경희·신진환 기자 ari@tf.co.kr, yaho1017@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