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탐구 ②] 30년 정치 인생 'his story'

새누리당이 7월 15일을 기해 새 진용을 갖췄다. 앞으로 2년, 김무성 대표가 당을 이끈다. 그는 집권 여당 수장으로서 박근혜 정부를 돕고, 견제하는 구심점에 섰다. 야당과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내야 하는 임무도 막중하다. 옛말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던가. <더팩트>는 '인간 김무성'을 들여다봤다. <편집자 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30년 정치 인생이 주목받고 있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하며 정치에 첫발을 들였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을 맡으며 정치적 몸집을 키웠다. 2007년과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의 대선 가도를 돕기도 했다. /서울신문·김무성 블로그 제공, JTBC 방송 화면 캡처

[더팩트 ㅣ 고수정 기자] 코흘리개 시절 '골목대장' 노릇을 했던 한 남자가 지난 14일 집권 여당의 명실상부한 '대장'이 됐다. 새누리당 김무성(63) 대표의 이야기다. 시쳇말로 날고 기는 사람들만 모인다는 국회에서 '김무성 대장'의 약칭 '무대'라는 별명으로 이름을 떨쳤고, 정치 인생 30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건 '배'를 출항시켰다.

집권 여당 대표가 된 그는 평소 꿈꾸던 '대망론'에 가까이 가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여권 내 차기 대권 주자 '톱 3'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정치적 스승' 김영삼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 공천 학살 등 우여곡절이 많은 김 대표가 당 대표가 되기고, '잠룡'이 되기까지의 '30년 정치 인생'을 들여다본다.

◆ 부산 '골목대장'이 '금배지' 달기까지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 2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며 당대 거부(巨富) 반열에 오른 아버지(김용주)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건장한 체격을 가졌기에 골목대장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무대'라는 별명도 그때 붙었다.

김 대표는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자마자 26세(1976년)라는 나이에 동해제강 상무로, 32세(1982년)에는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지냈다. 인생의 첫걸음을 기업에서 시작하며 사회생활을 배웠다. 그는 이때 성공한 '젊은 리더'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1980년부터 정치에 뜻을 품기 시작했다. 서울 중동고 재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기 위해 서울 시내 고교 대표들과 연합 시위를 이끈 경험이 있던 그는 자신의 야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김 대표는 결국 1983년 사업체와 주식을 모두 정리하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경남중 선배'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1년 뒤 김 전 대통령을 따라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고, 1987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6·10 항쟁에 뛰어들었다. 이후 '정치적 스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낙선하자 절치부심하던 그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에서 여러 당직을 거쳤다.

1992년에는 15대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을 지낸 뒤 내무부 차관까지 올랐다. 김 대표가 첫 금배지를 단 때는 1996년 15대 총선이다.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구을에서 내리 3선에 성공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다.

◆ 두 번의 시련과 '백의종군' 그리고 5선 고지

김 대표는 친박(친박근혜)계 좌장으로 불렸던 2008년 당시 친이(친이명박)계가 주도한 18대 총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공천에서 이른바 친박 공천학살로 희생당했다. 2008년 3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탈당 기자회견 중 눈물을 흘리고 있는 김 대표. /서울신문 제공

그러나 2008년에 첫 시련이 찾아왔다. 이른바 '친박(친박근혜) 공천학살'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선 경쟁자였던 당시 박근혜 후보의 캠프 좌장이었다는 이유로 친이계(친이명박계)가 주도한 공천에서 희생당했다. 당시 김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다른 당은 '감동공천'을 하는데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은 '감정공천'을 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후 김 대표는 '친박 무소속연대'를 결성해 부산·경남권 후보들을 대거 당선시키며 여의도에 복귀했다.

2010년에는 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세종시 수정안에 공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멀어졌고, 이는 두 번째 시련의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친이 세력의 지원을 받아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친박계와도 껄끄러운 사이가 됐다. 결국 친박계가 주도한 2012년 19대 총선에서도 공천 심사과정에서 탈락했다.

'백의종군'을 선택한 김 대표는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맡아 박 대통령의 당선에 일조했다. 이후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출마해 5선의 고지에 이르렀다.

◆ '무대' 30년 만에 집권 여당 대표 되다

김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표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더팩트 DB

특유의 리더십과 추진력으로 여의도에 재입성하기 전부터 차기 유력 당 대표 후보로 거론됐던 그는 10·30 화성갑 보궐선거로 돌아온 서청원 의원과 당권을 두고 경쟁을 벌여왔다. '통일경제교실' '근현대사 역사교실' 등 각종 공부 모임을 주도하며 세를 불렸고, 마침내 지난 14일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장' 자리에 올랐다.

'무대'의 야망은 당 대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김 대표는 새누리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당선되며 여권 내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5~16일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권 차기 대선 후보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김 대표가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정몽준 전 의원을 누르고 1위에 올랐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김 대표의 정치 인생 30년은 새로운 시기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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