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지개명 화투 장례 언어 등 생활 곳곳 일제 흔적...민족 정통성 바로 세워야
[더팩트|이선화·이덕인 기자] "광박에 쓰리고, 앗싸 고도리~"
명절이면 집집마다 울려 퍼지던 이 소리가 무척 정겨울 때가 있었다. 담요를 깔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아버지가 패를 맞추면 아들이 동전을 모으던 익숙한 풍경, 바로 별다른 놀이문화가 없던 시기에 즐겼던 화투 놀이다.
달마다 4장씩 총 48장의 그림패가 있고 각각 짝을 맞춰 점수를 따내는 화투는 우리나라 놀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대중적이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찾았다. 민속놀이로 여겨질 정도로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화투, 과연 그 유래는 언제부터일까?
화투의 본래 이름은 하나후다(花札)로 일본의 전통 놀이다. 일본에서 도박행위로 만들어진 것이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화투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다양한 그림들이 있는데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이 3월, 천황가를 상징하는 국화가 9월 등이 그 예이다.
화투처럼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일제의 잔재는 의외로 많다. 민족말살의 목적으로 실시한 '창씨개명'과 비슷하게 우리 땅 이름을 멋대로 바꾼 이른바 '창지개명', 해방 후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집을 뜻하는 '적산가옥', 장례문화, 일본식 단어 등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일제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그 어느때보다 뜻깊은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여전히 남아있는 생활 곳곳의 일제 잔재를 추적, 친일 문화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
◆ 송도, 명동, 원남동...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 지명'
인천의 강남으로 불리는 송도(松島). 한자를 풀어보면 '소나무 섬'이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송도는 이름과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인천 앞바다가 출렁이는 해안가에 소나무숲조차 없는 이곳이 무슨 이유로 송도가 되었을까? 그 유래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도는 조선 시대 인천도호부 먼우금면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부천군 문학면 옥련리가 됐다가 1936년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일본식 지명인 송도가 되었다. 송도는 일제의 침략 도구였던 일본 군함 마츠시마(松島·마쓰시마)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해방 후 송도를 옥련동으로 바꿨지만, 2000년대 인천 앞바다를 매립해 육지로 만들면서 해당 지역(옥련동 옆)에 다시 송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본 군함 국제 도시. 그것이 지금의 송도국제도시다.
송도 외에도 남아있는 일본식 지명은 의외로 많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명동은 일본의 메이지 일왕을 기리는 이름 명(明)에 동을 붙여 만들었다. 인사동은 일대 여러 고을을 합친 후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 사를 임의로 따서 지었으며 익선동은 돈령동과 궁동, 익동, 이동, 한동 등의 각 일부를 통합했고, 원남동·원서동은 우리나라 고궁을 격하 시켜 부른 창경원의 남쪽·서쪽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일제는 1914년 창지개명을 통해 국내 고유 지명들을 강제로 일본식으로 바꿔놓았다. 고유 지명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일본식 지명은 서울에서만 30%가 넘는다.
◆ 'ㅇㅇ동 ㅇㅇ번지'. 지번 주소
지금은 구주소라고 불리는 지번 주소 역시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일제가 만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전국 토지에 번호를 부여했고 소유자를 조사한 후 전 국토의 40%를 강제로 수탈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지번 주소다.
지번 주소를 사용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보다 일찍 주소체계를 개편 중이다. 우리나라는 2014년부터 도로명 주소 체계를 시행하고 있지만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직 혼용되고 있다.
◆ '유치원? 유아원?'
교육 현장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생각보다 많다. 태극기를 액자에 걸어두는 관례나 조회, 교복이나 두발 단속, 수학여행 등은 일제강점기 일본식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치원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유치원은 부산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인의 유아기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으로 시작했으며 독일어인 킨더가르텐(Kindergarten)을 일본식으로 번역하면서 생긴 용어다. 또한, 유치원에는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중국은 해방 직후 '유아원'으로 명칭을 바꿨지만,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사용 중이다.
◆ '적산가옥과 머릿돌'
쉬이 볼 수 있는 일제의 잔재 중에는 적산가옥도 빼놓을 수 없다. 구 서울역사, 서울도서관, 한국은행부터 상암동 근린공원에 복원한 일본군 관사, 인천 개항장 거리에 있는 일본은행 인천지점, 일본인들의 거주했던 후암동 일대 적산가옥, 강제 노역에 동원됐던 노동자들의 주택인 영단주택 등 다양하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시대 우리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보존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머릿돌(정초석)은 다르다. 위 건물의 일부에는 조선 총독의 휘호가 새겨진 머릿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건널목 앞에 있는 한국은행 머릿돌에는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휘호가 새겨져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오른쪽 머릿돌에도 사이토 총독의 글씨가 새겨있으며 마포의 한 아파트 진입로 끝자락에는 조선 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의 글씨가 원형 그대로 복제돼 있다.
구 서울역사에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글씨가 새겨진 머릿돌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서울역에서 마코토 총독을 척살하고자 했던 강우규 의사 동상과 불과 10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다. 머릿돌에 새겨진 총독의 휘호. 그것을 보며 우리는 무엇을 되새겨야 할까?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아픈 역사의 흔적이다.
◆일제가 이름 붙인 '창경궁 춘당지'
조선의 세 번째 궁궐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 수난을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흔적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 고궁을 격하시키기 위해 창경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동물원, 식물원, 온갖 놀이시설들을 조성했다. 또한 수 천 그루의 벚나무를 심고 케이블카를 설치하면서 60여 채의 전각과 담장, 궁 문들이 철거되거나 변형됐다. 1984년부터 궁궐 복원사업이 진행됐지만 완벽하게 복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춘당지다.
지금의 춘당지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있는데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백연담)다. 아래쪽 큰 연못(내농포)은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으로 본래는 연못이 아닌 논이었다. 춘당지란 명칭도 춘당대 옆에 있는 못이라는 뜻으로 일제가 붙인 이름이다. 사실상 연못을 복원할 수가 없어 그대로 남겨져 있는 일제의 잔재 중 하나이다.
◆ '일상에 녹아있는 일제의 흔적'
겨울철 대표 음식 붕어빵도 그 시작은 일본의 풀빵인 다이야끼다. 다이는 우리나라의 도미를 뜻하며 도미 모양의 틀에 밀가루 반죽과 팥 앙금을 넣어 만드는 방식이 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붕어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팥앙금 이외에 슈크림이나 고구마 앙금을 넣어 다양하게 바뀌고 있지만, 제조과정은 큰 차이 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외에도 일상에 녹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많이 있다. 고된 일을 일컫는 일본어인 노가다, 물방울 모양을 일컫는 일본 단어인 덴덴을 우리식으로 발음한 땡땡이, 선임을 뜻하는 일본어를 우리식으로 표현한 고참, 1930년대부터 사용한 일제 강점기 단어 잔업, 서열을 조장하며 일제가 편의를 위해 지은 제일·중앙 등의 명칭,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 기본 안주를 일컫는 스끼다시, 그룹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구락부, 모호하다의 일본식 표현인 애매, 빵집 이름으로 흔히 사용되는 '~당'. 전부 일본의 흔적이다.
◆ '간소화된 장례문화'
1934년 조선총독부가 정한 '의례준칙'. 이 안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 문화를 무시하고 상주와 상복, 슴렴, 상기 등 간소화된 장례문화가 제시돼 있다. 삼베 수의, 유족 완장이 그 예이다.
본래 우리나라 수의는 생전에 입던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사용함에 따라 주로 비단이나 명주 등이 쓰였다. 하지만 일제는 비단 수의가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삼베 수의로 격하시켰다. 상복도 본래 입었던 굴건제복이 아니라 두루마기에 통두건을 착용하거나 상장을 달도록 제한했고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이 외에도 병풍 대신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장식, 공동묘지 등은 전부 일제의 잔재이다.
◆ '주머니 속' 친일의 흔적
일제의 잔재는 친일파의 흔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화여대 설립자인 김활란은 1930년대부터 친일·반민족 행위를 일삼았던 대표적인 친일 인사다.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여러 친일단체에 참가했고 신문과 잡지에 글을 남기는 등 다양한 친일 활동을 했다. 김활란은 이대 캠퍼스 한가운데에 동상으로 남아 여전히 그 위풍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폐에도 친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만 원짜리 속 세종대왕 영정을 그린 이는 천재 화가로 알려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오만 원권 속의 신사임당 영정 역시 이당 김은호 화백의 작품이다. 두 사람은 친일 혐의가 농후한 작품들을 여럿 발표하며 대한민국 미술계의 원로로 대접받았다.
주머니 속에 늘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지폐.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이다.
광복 후에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일제 잔재 청산은 우리의 숙원이다. 일상생활에 자리 잡아 일제의 잔재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수많은 것들을 지금이라도 청산하고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속담이 있다.
74년 전 이 땅에 울려 퍼졌던 "대한민국 만세!"처럼 청산하지 않은 일제의 잔재를 바로잡아 당당한 역사를 세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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