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세정 기자] 이르게 찾아온 더위에 기계가 내뿜는 열기가 더해지자 40년 장인의 이마에 송글송글 세월이 맺혔다. 더위를 식히는 비가 서울 을지로 공구상가 곳곳을 적시자 과거 사람 향기로 가득했던 골목은 빗물과 금속 냄새만 남아 쓸쓸한 기분마저 든다. 북적였던 상가 곳곳은 행인들의 발길마저 뚝 끊겼다. 이따금씩 들리는 기계음 만이 상가 골목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마음만 먹으면 탱크도 만든다'는 대한민국 IT산업의 원조 을지로 공구상가가 잘나갔던(?) 과거를 뒤로 한 채 씁쓸한 철거 위기에 놓였다. 서울시가 추진한 '세운재정비촉진사업'이 시작되면서 청계천변과 맞닿은 구역 일부에 철거 공사가 한창이다.
그런 탓일까? 상인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카메라를 들고 거미줄 처럼 복잡한 골목 곳곳을 돌며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했지만 대부분 거부하기 일쑤였다.
◆역사가 숨쉬는 공구 골목
작업장 안에서 한 남성이 틀에서 굳힌 철제를 떼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맞은편 철거 현장의 굴삭기 소리와 망치소리가 뒤섞여 신경이 곤두설만한 상황이었지만 남성은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검정 뿔테 속에 선한 눈동자를 가진 '신아주물' 김학률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겼다. 10대부터 주물일을 배웠다는 김 사장은 을지로에 공구상가가 생기기 이전부터 자리잡은 이곳 주물 공장에서 자신이 3대째를 이어가고 있다. 공장 곳곳에는 붕어빵 틀부터 작은 기계 부품 까지 손때가 묻은 수백 수천개의 작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주물틀이 제 역사예요" 김 사장이 자식 같은 물건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을지로 공구상가에 젊은 사람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을지로 공구상가를 견학하러 온 연극인들이다. 김 사장은 이런 방문에 익숙한듯 작업장 곳곳을 소개했다.
"여기가 엄청 유명한 곳이에요. 배우 윤계상 나온 <소수의견> 알아요? 여기가 그 영화에도 나왔어요" 라며 흥분하며 말한 뒤 "그때는 저기 맞은편에 가게들도 다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어" 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을지로 공구 상가의 옛날 이야기로 화제를 바꿨다.
"옛날에 진짜 탱크도 1/25 크기로 만들었다니까요. 진짜 포까지 발사되는 거" 라며 공구상가 예찬을 늘어 놓았다.
◆재정비 사업 그리고 재검토
서울시는 세운상가 주변 지역을 재정비촉진지구(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했다. 세운상가는 그대로 보존하는 방향으로 놔두고 나머지 구역을 재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을지로 공구거리가 있는 이곳 3구역의 대지면적은 3만 6,747㎡. 3-1부터 10까지 10개 구역으로 나뉘어 재개발사업을 진행한다. 이중 청계천과 맞닿아 있는 3-1구역과 3-4, 3-5 구역은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설 예정으로 입주자와 이전 협의가 돼 이미 공사가 한창이다.
공구상가가 밀집된 3-2구역과 3-6구역, 3-8구역은 2017년 4월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보상 협의를 진행중이었으나 올해 초 서울시가 을지면옥과 양지옥, 을지다방 등 세운 3구역 내 생활유산으로 지정된 노포(老鋪)와 제조업체들의 이주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돼 3구역 일부의 재개발 계획을 재검토 중이다. 정비사업을 수정, 보완해 올해 12월까지 종합대책을 내놓겠다는 게 서울시의 계획이다.
세운지구의 최대 강점은 사실상 서울 사대문 안에 마지막 남은 대규모 개발지라는 점이다. 재개발이 마무리되면 좌로는 광화문 상권, 우로는 패션 메카로 도약한 동대문 상권, 남으로는 넘치는 관광객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명동상권을 직접 연결하는 서울 지역 최대 경제권역으로 급부상할 전망이다.
◆수 십년 생계의 터... '반대하는 상인들'
을지로 공구거리는 '제조업의 심장'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업체간의 유기적인 분업 체계를 갖췄기 때문이다. 기계나 각종 물품을 제작시 재료부터 최종 마감까지 모두 공구상가 내에서 한번에 해결 가능하다. 원재료를 취급하는 업체 가공 하는 업체, 그리고 빠우(금속 광내기) 작업 업체들이 서로의 특장점을 살려 협업을 이뤘다.
이런 탓에 '세운상가에서는 탱크까지 만들 수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상인들은 말한다. 골목 골목이 낡고 어지럽게 얽혀있지만 상인들의 정이 한데 뭉쳐 하모니를 이루는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다.
서울시는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새 상가에 기존 제조업 상인들이 입주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송파구 장지동 가든파이브와 같이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대책을 내놓겠다 했다. 그러나 상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위원장을 맡고 있는 '두루통상' 강문원 사장은 "새로 지어진 상가에 입주하게 되더라도 높은 임대료 문제뿐만 아니라 기존 1층 건물에서 하던 프레스나 주물 등의 작업 과정을 2층, 3층에선 하기엔 소음이나 진동 등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것"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면 자생적인 협업이 자연스럽게 깨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업적-역사적 가치, 올바른 판단·공감 필요'
재정비, 도시재생과 같은 사업은 상업적인 가치와 역사적 가치를 잘 따져야 한다. 대형 업무용 오피스들이 들어선 종로의 피맛골이나 동대문운동장 터에 들어선 디자인플라자와 같이 대부분 우리 주변의 재생 사업은 장소의 역사적 가치보다 상업성을 더 크게 판단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물론 재정비된 새 건물로 쾌적함과 편리함이 생긴 것도 맞다. 하지만 공간의 역사가 사라지면 그 기억도 언젠간 잊혀진다. 이해 충돌 사이에 무엇보다 공감이 필요한 부분이다.
오래됐다고, 낡았다고 그냥 사라져도 되는 것은 아니다. 7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형성된 이곳 을지로 공구상가의 역사적 가치를 돌아봐야 할 때다. 전면 재개발과 재검토 사이에서 잠시 멈춘 을지로 공구상가. 점점 희미해지는 이곳의 기억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넓고 깊은 견해의 올바른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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