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일홍의 스페셜인터뷰88-혜은이] "30년 빚 100억, 그래도 희망 있어 감사"

누구한테 속시원히 털어놓을 생각을 못했죠. 이제는 정말 편안합니다. 1970,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혜은이는 결혼과 이혼, 재혼 등의 과정을 겪으며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이새롬 기자

데뷔 45년, 이혼 아픔 딛고 홀로서기 "훨훨 날겠다"

[더팩트|강일홍 기자] 혜은이(65·본명 김승주)는 지난 1970년대와 80년대 상큼발랄한 이미지로 한국 가요계를 휩쓴 '싱어퀸'이었다. 1975년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시작으로 이후 10여년간 '진짜진짜 좋아해' '열정' '감수광' '제3한강교' '당신만을 사랑해' '뛰뛰빵빵' '열정' 등을 히트시키며 '혜은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갓 스물에 혜성처럼 등장한 뒤 20대 초반에 이미 10대 가수상, 가수왕, 최고 인기가수상 등 지상파 3사 통합 가수왕을 수상했다. 1977년 일본 '야마하가요제'에 출전한 뒤 '당신만을 사랑해'를 일본어 가사로 내고 활동하는 등 조용필 보다 앞선 원조 한류가수의 위상을 보여줬다.

"울기 싫었어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노력했죠. 나를 찾고 싶었어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만큼 갇힌 생활을 해온 것같아요.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죠. 이달 중순부터 대학로에서 3년 만에 콘서트를 해요. 늦었지만 이제라도 훨훨 날고 싶어요."

혜은이는 최근 배우 김동현과 이혼소식을 알리며 속내를 고백했다. "30년을 살았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법원에서 도장 찍고 난 뒤 '미안하다'는 남편을 보며 펑펑 울었다." 그는 10개월 전인 지난해 7월께 협의 이혼으로 김동현과 30년 부부관계를 정리했다.

데뷔 후 최정상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혜은이는 결혼과 이혼, 재혼 등의 과정을 겪으며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특히 1990년 김동현과 재혼 후엔 사업에 실패한 남편의 빚을 떠안으며 생활고에 짓눌려 살았다. 이혼 후 콘서트로 돌아온 그의 지난 아픔과 슬픔,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들어봤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충무로 한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근심 걱정 모두 떨쳐버려, 다 잘될거야(하쿠나 마타타). 혜은이는 라이온킹에 등장한 대사로 인터뷰 마지막 말을 대신했다. 스페셜인터뷰는 지난 10일 서울 충무로 한 카페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새롬 기자

-이혼 소식을 알린 뒤 많은 분들의 격려와 위로가 쏟아졌다고 들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니고, 누구의 엄마도 아닌 가수 혜은이를 되찾고 싶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저는 정말 몰랐어요. 저에게 이렇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사실을요. 한때 가수 혜은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자연인 혜은이로는 늘 자신이 없었거든요. 남편 문제 등 가정사로 자주 입에 오르내렸잖아요. 사실 이혼 사실조차 비난과 질책이 두려워 알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분들이 격려해 주시더라고요. 제 아픔까지 공감하고 위로해주시는걸 보고 눈물이 났어요. 이제라도 열심히 노래하며 이런 팬분들에게 평생 보답하고 살아야죠. 강 기자님이 쓰신 첫 이혼기사를 제 딸이 봤나봐요. 앞으로는 누구의 아내나 엄마도 아닌 '가수 혜은이'로 살라고 했어요. 30년간 망각하고 살아온 걸 딸이 깨우쳐준거죠.

혜은이는 10개월 전인 지난해 7월께 협의이혼으로 김동현과 부부관계를 정리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달 29일 <더팩트> 단독 보도로 알려졌다. 혜은이는 보도 직후 인터뷰를 통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함께 하고 싶었다"면서 "도장을 찍고 난 뒤 '미안하다'는 남편을 보며 펑펑 울었다"고 당시 힘들었던 심경을 처음으로 털어놨다. ([단독] 혜은이, 배우 김동현과 '황혼 이혼'...30년 부부 인연 마침표)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하고 미팅 약속을 한 뒤에도 이혼 등의 얘기가 나오면 힘들어할 것 같아 내심 걱정이 있었다. 예상밖으로 표정이 밝고 편안해 보인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네 이제는 정말 편안합니다. 슬픔은 슬픔으로 치유한다고, 펑펑 눈물을 쏟아내면 응어리가 풀린다고 하잖아요. 그동안 세상 모든 고통을 저 혼자만 짊어지고 산다고 생각했어요. 누구한테 속시원히 털어놓을 생각을 못했죠. 오히려 누가 알까봐 꼭꼭 덮고 감추려 급급하고 살았으니까요. 이혼 사실을 지난 1년간 묻어둔 것도 그 때문이에요. 살다 보면 매듭을 풀어야할 때도 있지만, 매듭을 지어야할 때도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널부러져 있는 걸 그대로 두면 절대 정리가 되질 않아요.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좀 아프더라도 그냥 내버려 둘 게 아니라 매듭을 지어야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60대 중반의 나이에 얻은 또 하나의 깨달음이에요.

혜은이는 1984년 사업가와 결혼 후 4년 만인 1988년 이혼했다. 2년 뒤인 1990년 김동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아들여 재혼했다. 결혼 후 김동현이 사업에 실패한 뒤 보증을 선 혜은이는 빚더미에 싸여 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김동현은 1970년대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뒤 1990년대까지 중후한 이미지로 안방극장을 호령했지만 영화제작과 부동산 개발에 뛰어든 뒤 돈 문제로 불미스런 일에 자주 휘말렸다. 혜은이의 지인들은 "(김동현 씨가) 각종 사건 사고에 연루되는 가운데서도 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부부의 사랑은 애틋했기 때문에 60대 중반을 넘어 이혼까지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60대 중반의 나이, 이제라도 새처럼 훨훨 날고 싶어요. 혜은이는 팬클럽 열정의 회원들이 자신의 마음을 반추해 담은 편지글에서 지금까지 나, 혜은이를 위해 살진 못했지만 이제는 그 어느것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이새롬 기자

-이혼과 함께 마음의 정리를 모두 끝냈음에도 김동현 씨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무슨 얘기인가?

부부가 30년이나 함께 살면서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있었겠어요. 아이들 아빠가 엎질러 놓은 돈 문제에 시달리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았을지언정 부부의 애틋한 정까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이제와서 고백하면 저는 가정주부로서는 마이너스예요. 이른 나이부터 가수활동을 하다 보니 음식 같은 일상적 주부의 역할을 잘 못했으니까요. 남편이 밖에서 사고는 많이 쳤을지언정 집에 들어와서는 저 대신 살갑게 주부 역할을 많이 했어요. 음식 요리도 저보다 잘했고요. 저는 또 남편이 잘못된 길로 가는 걸 막지도 못했어요. 싸워서라도 강하게 어필하고 내조하지 못한 게 후회스럽죠. 이제와서는 다 부질 없는 일이지만요.

이미 한 차례 이혼의 아픔을 딛고 김동현과 재혼한 혜은이의 결혼생활은 파란만장했다. 김동현은 수차례 사기 혐의로 피소됐고 벌금형에 법정 구속되기도 했다. 김동현의 사업 실패로 인한 수십억 원의 빚은 혜은이 몫이었다. 혜은이는 "결혼 후 행복했던 기억은 많지 않다"면서 "아들을 낳은 기쁨도 잠시였고, 남편의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차츰 가수활동도 버거웠다"고 말했다. 혜은이는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밤무대와 행사 등을 전전했다. 이혼과 관련해 혜은이는 "남편이 '정말 미안하다며 이제라도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며 이혼을 하자고 했다"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심정을 생각하며 제 마음도 많이 아팠다"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아직도 빚은 일부 남아있다고 들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현재 경제적 형편은 어떤지 궁금하다.

네, 빚은 조금 남아있긴 한데 감당할 수준이에요. 앞으로 2~3년만 더 벌어 갚으면 될 듯해요. 형편이 여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동안 살아온 것처럼 숨막힐 정도는 아니거든요. 돈 때문에 고통스런 날들을 많이 경험해봐서 내일의 희망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하고 행복해요. 사실 돈은 엄청나게 많이 벌었어요. 10대 가수 시절부터 오랫동안 정상에 있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많이 번 만큼 누리고 살아보진 못했어요. 인기 있을 땐 바빠서 쓸 틈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한번 꼬이기 시작하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헤어나지를 못했죠. 돈이란 아무리 많이 벌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을 새감 실감해요.

혜은이는 "그렇게 많이 벌었는데도 빈손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면서도 "지금 당장의 목표는 조금 남아있는 빚까지 전액 갚는 것"이라고 말했다. 남편 사업실패로 고스란히 빚을 떠안은 혜은이는 그동안 현금으로 갚은 돈만 약 30억~50억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고도 친정 어머니 집과 친정 작은 아버지 집, 그리고 시부모 소유 재산까지 모두 5채의 집이 날아갔다. 전성기 시절 고향 제주에 사놓은 토지도 결국 팔아야 했다. 그는 "30년간 짊어지고 산 전체 빚 규모는 100억 원대"라면서 "대부분 가까운 지인 또는 사채 빚이어서 많든 적든 성의껏 갚아야 했기 때문에 파산 신청은 아예 생각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혜은이는 오는 22일부터 한 달간 대학로 SH홀에서 콘서트 그대를 위한 선물을 진행한다. 사진은 5년 전 혜은이가 출연한 뮤지컬 울지마 톤즈 연습 장면. /임영무 기자

-악극단장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경험을 했다고 들었다.

맞아요, 아버지가 유명 악극단을 이끌고 계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를 수 있었어요. 또 악극단원분들이 예뻐해주셔서 어린 나이에도 부끄럼 없이 무대에 섰던 것 같아요. 그땐 어른들의 칭찬을 들으며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는데 아버지 악극단이 쇠퇴기를 맞고 망한 뒤엔 생계를 위해 무대에 올랐죠. 아버지가 몸져 누운 18살부터 미8군에 출연했어요. 어린 시절 무대 경험이 훗날 대중 가수로 활동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된 것 같아요. 저한테는 하늘이셨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은 지금도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변사 출신의 혜은이 아버지 고 김성택 씨(83년 작고)는 악극단 '낙랑쇼' 단장 시절 전국을 누비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안방극장에 TV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혜은이는 "제가 어렸을 때는 전국의 유명한 악극단원들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 악극단 무대에 섰을 만큼 잘 나가셨다"면서 "TV 물결에 밀려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걸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 신세를 많이 졌던 분들한테 사기를 당해 말년을 힘들게 보내셨다"고 말했다. 혜은이는 어린 시절 제주에서 태어나 조부모와 온 가족이 목포로 이사를 하며 제주를 떠난 뒤 7살 때 그의 부모만 다시 대전시 선화동으로 분가하면서 그곳에서 자랐다. 대전 선화초등학교와 호수돈여중고를 졸업했다.

-이달 중순부터 대학로 소극장 무대를 통해 대중 앞에 선다. 오랜만의 무대여서 각오가 남다를 것 같다.

콘서트는 작년부터 꾸준히 준비해왔어요. 코로나로 당초 예정보다 조금 늦춰졌는데 덕분에 여유가 생겼죠. 요즘 만큼 행복한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남편과의 결별 이후 무거웠던 마음도 모든 걸 솔직하게 고백하고 나니 홀가분해졌어요. 이번을 교훈 삼아 앞으로는 뭐든 감추거나 덮지 않고 훌훌 털고 가려고요. 콘서트는 3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진행하는 리바이벌 무대인데 워낙 많은 분들이 앙코르를 요청하셨기 때문에 더 유쾌한 마음으로 설 수 있을 것 같아요.

혜은이는 오는 22일부터 한 달간 대학로 SH홀에서 콘서트 '그대를 위한 선물'을 진행한다. 2017년 같은 장소에서 가진 40여일간의 공연으로 1만여 명의 관객들과 호흡했다. 300석 소규모 공연장으론 열기가 뜨거운 편이어서 지난해까지 20여곳의 지방 투어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혜은이는 "젊은 아티스들처럼 스탠딩 공연을 해보고 싶다"면서 "실제로 공연 중간에 스탠딩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는 "이런 점을 감안해 이번 공연부터는 마지막 20분 가량을 아예 신나는 댄스 분위기로 펼쳐갈 생각"이라고 일부 콘셉트를 귀띔했다.

혜은이는 5년만에 새 앨범 그대를 위한 선물을 발표했다. 후배가수 홍서범이 선물한 그래는 팬클럽이 직접 제작하고 회원들이 코러스까지 넣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BSA엔터테인먼트

-콘서트에 앞서 오랜만에 새 음반도 냈는데 팬클럽 회원들이 제작하고 코러스까지 참여했다고 들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

팬클럽이 직접 제작하고 회원들이 코러스까지 넣어 음반을 만든 건 아마 전 세계 최초일거예요. 타이틀곡 '그래'의 도입부와 후렴구는 회원들이 합창으로 참여했어요. '그래'는 원래 홍서범 씨가 록 발라드풍으로 거칠게 불렀던 건데 팬들 참여 덕분에 훨씬 부드러운 느낌으로 와닿죠. 앨범 타이틀 'le cadeau pour toi'는 프랑스어로 '그대를 위한 선물'이란 뜻인데 상처받은 저를 향한 팬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겼어요. 평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팬들에게 위로받고 교감해온 저의 마음이라고 해도 무방해요.

혜은이의 새 앨범 '그대를 위한 선물'(le cadeau pour toi)은 '눈물샘'(최백호 작사 작곡) 이후 5년 만이다. 후배가수 홍서범이 선물한 '그래'를 타이틀 곡으로, 팬들의 요청을 받아 재수록된 '감수광'(레게 버전) '나는 여자예요' ‘재회’까지 총 4곡이 수록됐다. 타이틀 곡 '그래'는 지난 날을 반추하면서 동시에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고 싶은 혜은이의 고민이 가장 잘 드러난 가사가 인상적이다. 혜은이는 "그만큼 저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얼마 전 방송된 TV조선 '마이웨이'에서 "새처럼 훨훨 날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고, 방송을 본 수많은 네티즌들이 여기에 공감했다.

어느 부부도 싸우지 않고 살 수는 없어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열심히 살았지만 자꾸만 실타래가 얽혔을 뿐이에요. 처음엔 자식 때문에 참는 게 미덕인 줄 알았죠. 한참 마음 고생하고 정말 속상할 때는 다 포기하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고요. '왜 하필 나지? 왜 내가 그래야 해?'라고 반문을 하다가도 '살다보면 잘 되겠지, 기왕 시작했으니 언젠가는 끝이 있겠지, 맨날 이렇게 살겠나' 이런 생각에 모진 생각을 접곤 했어요. 어쨌든 저는 60대 중반의 나이가 돼서야 자유로워졌어요. 누리꾼들의 공감은 늦었지만 이제라도 '가수 혜은이'로 다시 사는 모습을 보고싶어서라고 생각해요.

'헤어짐이 부끄러운 일은 아닌데도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내 부주의 일수도 있는데, 상대가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을까봐 겁을 많이 냈다. 그러나 누가 나의 헤어짐에 돌을 던지든, (혹은) 자격 운운 하더라도, 나는 당당해질수 있다. 지금까지 나, 혜은이를 위해 살진 못했지만 나는 이제 나를, 나의 일을, 그 어느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 헤어짐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도록 나는 나에게 더 많은 용기를 주고 있다. 행복해 보이는 내가 아닌, 정말 행복한 내가 되리라. 나에겐 아직 꿈이란 것이 있으니까'. (혜은이 팬클럽 '열정'의 회원들이 혜은이 마음을 반추해 담은 편지글 중에서)

데뷔 후 최정상 아이돌급 인기를 누린 혜은이는 결혼과 이혼, 재혼 등의 과정을 겪으며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TV조선 마이웨이 캡쳐

'3번의 가수왕상, 최고 인기가요상 2번, 여자최고가수상 2번, 여자 인기 가수상은 4번'. 혜은이는 데뷔 이듬해인 1976년부터 매년 방송사 연말 가요시상식의 가수왕, 최고 가요상, 인기가수상을 수상한 히트가수 아이콘이었다. '진짜 진짜 좋아해' '당신만을 사랑해' '제3한강교' 등은 동명영화 OST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는 또 젊음의 아이콘이었다. 최초의 언니 부대를 이끌며 패션, 헤어스타일 등의 유행을 창조했다. 1978년 태평양 가요제 입상을 계기로 동남 아시아권에서 '혜은이 열풍'을 일으켰고, 1989년엔 일본에서 싱글 레코드가 출반돼 10여년 만에 일본 프로모션 투어공연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팔자타령을 하지 않나. 운명을 비껴가는 사람이 있고 맞서서 싸우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맞서서 싸워왔다." 배우 김동현과의 이혼사실을 알리기 전까지 혜은이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의 고백은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대중에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대한민국 인기 가수였다.

이혼, 그는 1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의 막다른 선택이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인터뷰 하는 동안에도 혜은이는 줄곧 표정이 밝았다. 걱정해주는 필자에게 오히려 긍정의 마인드를 전파했다. 그는 '라이온킹'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유명 대사로 인터뷰 마지막 말을 대신했다. "근심 걱정 모두 떨쳐버려, 다 잘될거야(하쿠나 마타타, Hakuna mat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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