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의 B급칼럼]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를 위해

2009년 서울대병원에 마련됐던 고(故) 장자연 씨의 빈소. /더팩트DB

윤지오 논란으로 장자연 진실 덮여선 안 돼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삼성이 아차 했을 것이다. 역시 ○○○ 출신은 쓰면 안 된다."

2007년 우연히 합석한 한 술자리의 안주는 삼성 비자금 사건이었다. 정확히는 비자금 사건이 아니라 이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가 안줏거리였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실보다는 김 변호사를 둘러싼 루머에 더 주목했다. 그의 출신지를 문제 삼는 지역주의가 나오는가 하면 "단물만 쏙 빼먹고 배신했다" "운동권이 배후라더라" "가정사가 복잡하더라"는 등 불신의 술잔이 넘실댔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2019년의 데자뷔. 이번은 아직 가해자를 특정하지 못한 고 장자연 씨 사건이다. 역시 여론은 사건의 실체보다 윤지오 씨 논란에 꽂혔다. "장자연 씨와 친하지도 않다." "장자연 문건을 본 적도 없다." "자기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다."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문다.

정말 윤지오 씨가 고인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고 하자. 왜 문제인가. 시민들은 세월호 희생자와 일면식도 없어도 추모하고 유족을 돕는다. 어느 한국인 유학생은 생면부지의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내렸다가 목숨을 잃었다. 친한 사람이 아니면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더구나 그는 자신보다 더 고인과 친했고 사정을 잘 아는 목격자들이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윤 씨가 '장자연 문건'을 본 정황은 이미 알려졌다. 문건 원본은 7~8장 정도로 추정된다. 이중 공개된 것은 앞 부분 4장이다. 고인의 매니저였던 유 모씨는 2009년 검찰 조사에서 문건을 유족 등 몇몇 사람에게 보여주고 그 앞에서 불태웠다고 진술했다. 그 현장에 있었다고 지목한 사람 중 하나가 윤지오 씨다. 물론 윤 씨가 그 문건에서 봤다고 기억한 실명은 신빙성을 엄밀히 따져봐야 한다. 당시 고인이 불려나간 술자리에서 마셨던 술에 의심스러운 약물이 들었던 것 같다는 주장도 그가 밝혔듯이 추정이다. 가치가 없으면 배척하면 된다. 사건을 들여다보는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할 일이다.

지난 3월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한국여성의전화와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및 고 장자연 씨 사건 진상 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장자연 씨 사건의 증언자 배우 윤지오 씨가 발언하고 있다./김세정 기자

윤 씨 논란을 떠나서 우리 사회는 권력을 쥔 강자보다 증언자, 내부고발자에게 더 완벽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한다.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는 성폭력과 불법해킹 피의자지만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높다. 어산지가 한국에 있었다면 런던 에콰도르대사관에서 보낸 5년은커녕 5주도 버티지 못 했을지 모른다. 진실이 원하는 건 만인이 존경할 사람이 아니라 부족함은 있어도 용기를 내는 사람이다.

윤 씨의 언행이나 행동에 납득되지 않는 점은 있다. 그의 주장이 재수사 권고를 뒷받침하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건 9년 만에 처음 기소된 장자연 강제추행 피의자의 재판에서 결정적이고 유일한 증인 역할을 했다. 그의 ‘위태로운’ 행보가 장자연이라는 이름을 지우려 했던 세상을 깨웠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경찰이 윤 씨에게 지원했다는 숙박비 몇백만원에는 분개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고, 수사기관 수장이 충격을 받았다고 법정 증언할 정도의 외압과 부실수사 의혹에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지금도 포털에는 ‘윤지오 의혹’ 기사는 넘쳐나지만 외로운 죽음의 진실에 다가서는 단서들은 차창 밖 가로등처럼 스쳐간다. 우리는 정작 분노해야 할 대상을 잘못 골랐는지도 모른다. 윤지오로 장자연이 덮여서는 안 된다. 이미 늦었지만 진상조사단이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차분히 기다려야 했다.

대검찰청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은 13일 장자연 사건 조사 결과를 보고할 예정이다. 이 사건이 사실상 영구미제가 될지, 검찰 수사로 이어져 진상규명의 불씨를 살릴지 곧 판가름난다.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고 장자연 씨가 남긴 말이다. 처절하게 고독했을 마지막 순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다르기를 바란다. 막이 내리는 무대의 마지막 조명이 깜빡이고 있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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