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택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무려 8조원의 가상화폐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것도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건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바이낸스에서 약 63억 달러, 우리 돈 8조 원대의 가상자산이 무단 인출되면서 시작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자금이 불과 20여분 만에 빠져나갔다는 점이다. 그것도 블록체인 지갑에 있던 자산들이 추적이나 동결이 어려운 다른 가상화폐로 빠져나갔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런데 이틀 뒤인 지난달 31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공식 브리핑을 열고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조직 '트레이더트레이터'를 배후로 특정해 발표했다. 미국 비밀경호국과 국세청까지 투입해 자금세탁 경로까지 구체적으로 짚어내며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국제금융망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자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이 이례적으로 장문의 반박담화(2일)를 발표했다. 김여정은 미국의 주장을 ‘황당무계한 낭설이며, 정치적 도발’로 일축하며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가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북한이 "재고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 경고를 덧붙였다.
북한이 향후 어떤 조치를 내놓을 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과연 이 사건은 어디로 흘러갈까. 사안을 단순하게 보면 미국의 FBI는 북한의 해커조직을 단수로 지목했고 북한은 전면 부인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앞으로 국제적인 수사망을 동원한 추적과 수사로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건의 양상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해킹 배후로 지목될 때마다 부인해 왔지만, 이번처럼 김여정 명의의 담화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 사태가 북한 수뇌부에 민감한 사안임을 짐작케한다. 시점도 곱씹을 만하다. 조만간 중국에서 열릴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던 시점에 터진 사건이다.
특히 북한의 대외관계를 사실상 총괄하는 김여정의 입에서 ‘재고’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 주목된다. 어떤 식으로든 미북간 외교전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이유다. 또 김여정의 담화에서 미국이 불법으로 탙취된 가상자산을 몰수해 전략 비축으로 삼겠다고 한 점을 거론하면서 ‘자금이 회수되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져보라’고 한 대목도 음미해볼 만하다.
책임 공방을 미국의 이해관계 문제로 돌리려는 프레임으로 풀이된다. 이와함께 미국의 적대적 태도를 여러 측면에서 다시 따져 보겠다는 경고도 따져볼 만하다. 살짝 틀어서 보면 ‘다시 따져 본다’는 것은 거부가 아니라 조건을 다시 쓰겠다는 뜻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미국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분리 대응’ 기조가 엿보인다. 해킹은 수사와 제재로 다루고, 정상 외교의 문은 열어 두는 이중 트랙이라는 것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만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미국의 외교적 수사는 신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과거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 때처럼 미국 당국의 수사결과 범행의 배후가 분명히 드러나고, 이에 따른 미국 재무부의 제재와 세탁 경로 차단 등으로 북한의 피해가 커지면 북한은 강경 대응으로 나올 수도 있다. 최근 탄도미사일에 이어 순항미사일 도발을 이어간 북한이 도발 수위를 한층 끌어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현 시점에서 가장 큰 변수는 자금의 행방이다. 탈취 자금이 어디로 흘러 어떻게 세탁됐는지가 밝혀지면 사건의 무게가 달라진다. 세탁 경로에 중국이나 동남아의 장외 거래망이 얽혀 있다면, 이 문제는 북미를 넘어 더욱 복잡한 양상이 될 수 있다.
결국 분명한 범죄행위인 해킹 사태에 대한 사실 규명을 국제 공조를 통해 진행하면서 동시에 외교적 파장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를 지켜보는 일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