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스포츠의 감동은 언제나 ‘예고 없는 반전’에서 나온다. 화려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선수가 묵묵히 자신의 한계를 넓혀 마침내 새로운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준다.
2026년 대한민국 육상 트랙 위에서 바로 그 드라마틱한 반전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23년 동안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절망의 벽, 여자 400m 한국 기록을 새로 쓰며 한국 단거리의 새로운 에이스로 거듭난 김서윤(23·창원시청) 이야기다. 그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400m 결선에서 53초38을 기록하며 2003년 이윤경이 세운 53초67이후 무려 23년 동안 깨지지 않던 한국기록을 0.29초나 단축했다. 0.17초 차로 메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한국 여자 400m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레이스였다.
◆ 전국체전을 지배한 '2관왕'과 소름 돋는 역전극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제107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김서윤의 질주는 이어지고 있다. 아시안게임에서 한국기록을 작성한 뒤 다시 트랙에 선 그는 여자 400m에 이어 200m에서도 금메달을 차지하며 개인 첫 전국체전 2관왕에 올랐다.
김서윤은 18일 전국체전 여자 400m 결승에서 54초 10의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진짜 하이라이트는 주 종목이 아닌 200m 결승이었다. 성인 무대 진출 후 단 한 번도 200m 정상에 서지 못했던 그녀가 한국 여자 단거리의 절대 강자 김주하(시흥시청)를 상대로 믿기 힘든 역전극을 연출한 것이다.
초반 선두로 치고 나간 김주하를 뒤쫓던 김서윤은 막판 스퍼트로 역전에 성공하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23초99를 기록해 김주하를 0초08 간발의 차로 제쳤다. 큰 키와 긴 다리에서 나오는 넓은 보폭을 앞세워 막판까지 추격을 이어간 김서윤의 소름 돋는 역전극이었다.
◆ 혜성처럼 나타난 원석, 인생을 바꾼 스퍼트
사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김서윤은 육상계의 중심에 서 있던 선수가 아니었다. 국내 정상급 기량을 갖췄으면서도 늘 '최고'의 문턱에서 조금 모자랐고,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아본 적도 없었다. 경남체고 시절, 한 해 후배였던 '중학생 유망주' 양예빈이 자신보다 빠른 기록으로 여중부 400m 신기록을 써 내려갈 때 그저 부러움의 눈빛을 삼키던 평범한 선수였다.
김서윤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지난 5월 정선에서 열린 제80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였다. 여자 400m 결승에서 54초31 대회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김서윤은 이날 성적을 바탕으로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처음 달아본 태극마크다. 그 가슴 벅찬 마크 하나가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웠다.
꿈에 그리던 아시안게임 출전권이 주어지자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마저 단칼에 끊고 필라테스와 식단 관리로 대회 준비에 사력을 다했다. 진천선수촌에 입촌해 국가대표 출신 지도자의 조련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마치 스펀지처럼 기술을 흡수했다.
그 결실이 바로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이었다. 여자 400m 결선에서 53초 38을 기록, 23년 동안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한국 최고기록을 경신하며 대한민국 단거리의 새로운 에이스로 거듭났다.
◆ 개인전을 넘어 계주에서도 빛난 '멀티 플레이어'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김서윤의 진가는 개인전에만 머물지 않았다. 혼성 1600m 계주(4×400m)에서도 김서윤은 대표팀의 2주자로 나서 한국기록 수립에 힘을 보탰다. 대표팀은 종전 한국기록(3분22초87)을 4초21 단축한 3분18초66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한국 육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혼성 1600m 계주뿐 아니라 단거리 스피드가 중요한 400m 계주(4×100m)에서도 김서윤은 마지막 주자인 앵커를 맡아 트랙을 누볐다. 통상 폭발적인 스피드를 갖춘 100m 전문 선수들이 주로 맡는 자리에서 레이스를 마무리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400m에서 쌓은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주 종목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을 보여줬다.
◆ 할머니의 손, 그리고 경남을 떠나지 않은 이유
김서윤의 성장 과정에는 경기 기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200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계신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군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일을 계기로 육상에 입문했지만, 그녀에게 육상보다 더 소중한 것은 늘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였다.
다른 지역 실업팀의 영입 제의에도 김서윤이 창원시청을 떠나지 않고 경남에 남은 이유는 단 하나, 할머니 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단거리 전문 지도자가 없어 장거리 출신 감독과 허들 출신 코치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여건에서도 김서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다. 할머니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과 흔들림 없는 성실함으로 훈련을 이어온 그는 마침내 한국기록을 새로 썼다. 이번 제주 전국체전에서는 그토록 사랑하는 할머니가 트랙 곁에서 손녀의 경기를 지켜보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했다.
◆ 대한민국 육상, '서윤 시대'의 막을 올리다
김서윤의 등장은 한국 여자 트랙 종목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자 400m에서 23년 만에 한국기록을 경신한 데 이어 혼성 1600m 계주에서도 한국기록 수립에 힘을 보탰다는 점은 그의 스피드와 지구력이 개인 종목을 넘어 계주팀 전체의 전력까지 크게 격상시켰음을 보여준다. 또한 200m와 400m, 계주 종목을 모두 소화하는 독보적인 스피드 지구력은 한국 트랙 종목 전체에 호재임에 틀림없다.
후배의 기록을 부러움 속에 바라보던 선수는 7년의 세월 동안 훈련을 이어온 끝에 한국 여자 육상 트랙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한 해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성장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과 전문적인 지도, 국제무대에서의 경험이 뒷받침된다면 김서윤은 한국 여자 단거리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다. 대한육상연맹 역시 전국체전이 끝난 뒤 국가대표를 새로 선발하여, 전폭적인 전문 지도와 해외 전지훈련 등으로 그의 성장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23년 동안 깨지지 않던 한국기록을 넘어선 데 이어 전국체전 2관왕까지 차지한 김서윤. 그의 도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다. 김서윤이 한국 육상의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앞으로의 레이스를 지켜볼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