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라인 은퇴설'과 손흥민 '완장'...모레노의 진짜 시험대 '원팀' [박순규의 창]


남은 두 경기, 전술 넘어 선수 간 신뢰 회복까지…모레노 리더십의 이중 시험
아시안컵과 정식 감독 선정의 새 변수

한국축구대표팀의 임시 사령탑을 맡고 있는 로베르트 모레노 감독은 대표팀 내부에 잠재해 있던 갈등의 뇌관이 수면 위로 터져 나오며 ‘원팀(One Team)’을 재건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됐다./서울월드컵경기장=박헌우 기자

[더팩트 | 박순규 기자] 그라운드 위 전술가로 불리던 로베르트 모레노 임시 감독의 시선이 이제 피치 밖 라커룸 깊숙한 곳을 향하고 있다. 6경기 단기 계약의 임시 사령탑으로 한국축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소화한 4경기 성적표는 2승 1무 1패. 숫자만 놓고 보면 절반의 안착이지만, 남은 2경기를 앞둔 모레노 감독의 책무는 애초 기대했던 ‘스페인식 세밀한 빌드업’ 구현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표팀 내부에 잠재해 있던 갈등의 뇌관이 수면 위로 터져 나오며, ‘원팀(One Team)’을 재건해야 하는 무거운 숙제가 그의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최근 불거진 ‘96라인’ 주축 선수들의 피로감과 조기 은퇴설, 그리고 손흥민의 주장직 유지 여부를 둘러싼 세대 간 미묘한 기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수준을 넘어섰다. 카타르 아시안컵 이후 미봉책으로 덮어두었던 팀 내 역학 관계가 다시 흔들리면서, 선수단의 신구 조화와 심리적 결속은 남은 평가전의 성패는 물론 다가올 아시안컵과 차기 정식 사령탑 선임의 결정적 분수령으로 떠올랐다.

동양의 오랜 지혜를 담은 '맹자' 공손추 편에는 "천시불여지리, 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이 주는 좋은 기회도 땅의 이점만 못하고, 땅의 이점도 사람들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그라운드 위 화려한 전술과 천시(天時) 같은 승운이 따르더라도, 선수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이는 인화(人和)가 무너지면 팀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모레노 감독이 마주한 본질 역시 바로 이 ‘인화’의 복원에 있다.

로베르트 모레노 임시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이 2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베네수엘라와 친선 경기에서 0-0으로 비긴 뒤 착잡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울산=뉴시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히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그의 자서전 '리딩(Leading)'에서 "라커룸을 장악하지 못하는 감독은 전술판에서 아무리 위대한 전략을 짜도 피치 위에서 패배한다"고 단언했다. 퍼거슨은 에릭 칸토나, 데이비드 베컴, 로이 킨 같은 개성 강한 스타들이 충돌할 때마다 타협 없는 원칙을 세우되 개별 선수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정교한 심리전을 펼쳤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거스 히딩크 감독 역시 부임 초기 선후배 간의 경직된 위계질서와 파벌 의식을 타파하기 위해 식사 자리 테이블 배치를 바꾸고 반말 훈련을 도입하는 등 라커룸의 체질부터 뜯어고쳤다. 히딩크는 기술보다 먼저 선수 간의 신뢰와 심리적 평등을 구축해 하나의 유기체를 만들어냈다.

모레노 감독은 본래 데이터 분석과 세부 전술 기획에 강점을 지닌 ‘컴퓨터형 지도자’다. 그러나 지금 한국 축구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칠판 위의 전술 배치도가 아닌, 상처 입은 라커룸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리더십’과 ‘공감의 소통력’이다. 스페인 대표팀 시절 루이스 엔리케 감독을 보좌하고 잠시 지휘봉을 잡았을 당시에도, 그는 전술적 역량은 인정받았으나 선수단 장악과 권력 구도 정리에서 적잖은 부침을 겪은 바 있다. 모레노에게 이번 위기는 과거의 한계를 시험받는 자리이자, 자신의 리더십 스펙트럼을 증명할 결정적 무대다.

모레노호의 10월 A매치 마지막 경기를 2-0 승리로 이끈 한국 선수들./용인=KFA

갈등 해결의 첫 단추는 손흥민이라는 상징적 존재를 예우하면서도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의 균형을 재조정하는 데 있다. 주장 완장의 무게에 짓눌린 베테랑의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팀의 허리를 지탱하는 90년대 중반생 주축 그룹의 박탈감과 불만을 경청하는 정밀한 ‘소통의 디테일’이 절실하다. 누구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방식의 봉합은 더 큰 파열음을 부를 뿐이다. 역할의 재정의와 명확한 기준 제시를 통해 베테랑과 중참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남은 2경기는 모레노에게 단순한 전술 테스트베드가 아니다. 그라운드 위 유기적인 패스워크만큼이나 피치 밖 라커룸의 유기적인 신뢰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지, 그 ‘위기관리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다. 라커룸의 불협화음을 잠재우고 원팀의 결속을 이끌어낸다면 모레노는 ‘임시’ 꼬리표를 떼고 아시안컵으로 향하는 강력한 정식 사령탑 후보로 우뚝 설 것이다. 반대로 균열을 봉합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전술도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하다. 모레노의 진짜 승부는 이미 피치 밖에서 휘슬을 울렸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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