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한림 기자] 법원이 금융당국의 시가총액(시총) 미달에 따른 상장폐지(상폐) 규정에 급제동을 걸면서 시장이 혼선에 빠지고 있다. 한국거래소(거래소) 등 당국이 부실기업을 신속하게 증시에서 퇴출하겠다며 제도를 밀어붙였으나, 절차적 위법성을 지적받으면서 역풍을 맞은 형국이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2일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상장사 주연테크와 코스닥 상장사 케이엠제약이 한국거래소를 상대로 낸 관리종목지정결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본안 판결 확정까지 거래소의 상폐 절차를 중단하도록 결정하면서 당국과 상장사 간 법적 공방도 예고된다.
법원의 판단 배경은 상폐 시총 기준과 정책의 방향성보다 도입 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에 있다. 상폐 기준에 해당한 상장사를 퇴출하겠다는 과정에서 상장사들에 의견진술이나 이의신청 기회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은 부칙 조항이 비례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해서다. 자본시장 체질 개선과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시총 기준 적용 시점을 애초 계획보다 6개월가량 앞당기는 강수를 둔 당국의 속도전을 지적한 셈이다.
파장은 증시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법원 결정 이후 코스피의 SHD, 코스닥의 세진티에스와 에이에프더블유 등의 상폐 절차가 즉시 보류됐으며, 유사한 가처분을 신청한 다른 기업들도 도미노식 효력 정지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관리종목으로 지정됐거나 지정 예고 처분을 받으며 상폐 사정권에 몰린 기업만 해도 수십 곳에 달해 향후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렇다 보니 자본시장 정화를 내세운 당국의 명분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법원의 원칙 사이에서 애꿎은 개인 투자자들만 부작용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일부 주주들은 강화된 기준에 맞춰 정리매매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감수한 채 주식을 던진 상태다. 향후 본안 소송에서 당국의 기준이 정당했다는 판결이 난다면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이 피해를 보고, 반대로 위법성이 최종으로 확정되면 이미 주식을 헐값에 정리한 소액주주들이 제도의 희생양이 되는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다.
아울러 시총 미달 상폐 기준과 속도에 대한 법적 분쟁이 장기화한다면 투자자들의 자금이 장기간 증시에 묶이는 현상도 우려된다. 상폐 절차와 정리매매가 사실상 동시에 전면 중단되면서 보유 주식을 시장에서 매도해 현금화할 길이 막혀버릴 수 있어서다.
과거 사례에서도 상폐 관련 분쟁 장기화에 대한 위험성은 드러난다.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실이 한국거래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코스닥 기업이 상폐 가처분을 신청한 날부터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걸린 기간은 지난해 기준 평균 262.8일이다. 본안 소송에 이어 항소와 상고가 거듭되면 개인 투자자의 자금은 1년 가까이 증시에 표류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거래소도 법원 판단 직후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 상장규정 시행세칙을 곧바로 보완했다. 관리종목 지정이나 상폐 결정의 효력을 유예하거나 정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상폐 효력정지 가처분에 대한 후속 조치도 상장사에 대한 소명 기회를 보장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 보완할 것으로 보인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부실기업을 신속하게 솎아 내 증시 물을 맑게 하겠다는 당국의 거시적 방향성은 필요한 조치"라면서도 "법원의 가처분 인용으로 시장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향후 당국은 상폐 위기 상장사의 소명 기회를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등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규정을 다듬어 시장 유동성과 투자자 보호의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