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이태훈 기자] 역사가 정치의 전장이 됐다. 과거 사건과 인물을 둘러싼 해석이 학계와 시민사회의 토론을 넘어 정당 정체성과 결합하면서다. 진보·보수 진영 모두 자신들의 역사는 성역화하면서도, 상대 진영이 중시하는 역사에는 '검증'과 '표현의 자유'라는 상반된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정치권의 무리한 역사 요새화와 이에 따른 공방이 여론 분열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의힘 소속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은 6일 국회 소통관에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영화 '암살자(들)' 규탄 성명을 내고 상영 즉각 중단과 영화의 싱가포르 국제영화제 개막작 선정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은 영와 '암살자(들)'에 대해 "예술이 아니라 파렴치한 역사 왜곡이자 희생자들의 명예를 짓밟는 2차 가해"라며 "제작사는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 사실관계를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고인의 명예를 훼손한 점에 대해 백배사죄하고, 영화 상영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사건을 둘러싼 의혹과 배후 가능성을 추적한 작품이다. 개봉 이후 영화적 상상력의 범위를 놓고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고, 정치권까지 가세하면서 파장이 커졌다. 국민의힘은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에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관여됐을 가능성이 영화에 내포되어 있다며, 이는 영화 제작진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이라는 입장이다.
이번 '암살자(들)' 논란은 역사를 둘러싼 정치권의 첨예한 대립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는 평가다. 실제로 보수 진영은 이번 논란과 관련해 영화·제작진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진보 진영의 '역린'과도 같은 사안을 줄줄이 끌고 나와 반격에 나서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을 건드리면 줄줄이 고소·고발 당하는데, 박 대통령 모욕은 (진보 진영엔) 표현의 자유다. 5·18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감옥에 가는데, 6·25 북침론, 천안함 미국 잠수함 충돌 주장은 '표현의 자유'다"라고 비판했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도 "노 전 대통령 죽음을 권양숙 여사가 사주했다는 영화가 나온다면 그것도 표현의 자유인가"라고 반문했다.
역사적 사건과 역대 대통령을 매개로 한 진영 간 역사 공방은 과거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다. 보수 진영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에선 암살자(들)의 내용에 하등 문제가 없다며 오히려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관람 인증'이 쏟아지고 있다. 보수 진영에서도 지난 8월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5·18민주화운동을 재조명하는 성격의 토론회를 개최했다가 진보 진영의 거센 반발을 샀고, 최근엔 한동훈 무소속 의원이 노 전 대통령 관련 금품수수 사건을 연일 들추며 진영 간 거친 설전이 이어지고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은 보수 진영에서 건국과 산업화의 상징으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민주 진영에서 민주주의와 개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며 "이 때문에 역사적 사건은 물론, 특정 대통령 개인에 대한 평가가 정치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역사와 인물에 대한 성역화'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격화하는 정치권의 역사 논쟁으로 극심한 여론 분열이 우려되면서, 합의를 통해 제동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역사 왜곡' 판단에 대해 편향되지 않는 기준 적용으로 명백한 허위사실은 규제하되, 특정 역사관이나 정치적 평가까지 보호하는 장치로의 확대는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학계 관계자는 통화에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건 정부의 조사, 법원 판단 등으로 확정될 순 있지만, 그 사실에서 파생되는 가능성과 토론까지 전부 차단해서는 학계는 물론 예술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는 "각 진영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약어)이 문제의 본질"이라며 "비판하고자 하면 비판을 수용하는 태도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충돌이 커지고 여론도 함께 분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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