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전' 이민성, '29년 뒤' 엄지성...일본 무너뜨린 ‘두 번의 왼발’ [박순규의 창]


도쿄대첩 주인공에서 AG 4연패 감독으로…엄지성 결승골로 완성된 '명예회복'

한국 이민성호의 캡틴 엄지성(7번)이 3일 일본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결승골 활약으로 1-0 승리를 견인, 사상 최초의 대회 4연패를 기록한 뒤 기쁨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다./나고야=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축구에는 가끔 세월을 뛰어넘어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순간이 있다. 주인공은 달라도 상대가 같고, 승부를 결정한 발이 같고, 그 한 방이 만들어내는 전율마저 닮는다.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 한국은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일본과 운명의 한일전을 벌였다. 0-1로 끌려가던 한국은 서정원의 동점골로 균형을 맞췄고, 후반 41분 중앙수비수 이민성이 앞으로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왼발을 휘둘렀다. 강력한 중거리슛은 일본 골문을 갈랐다. 한국의 2-1 역전승.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은 ‘도쿄대첩’의 완성이었다.

그로부터 29년이 흘렀다. 2026년 10월 3일 일본 나고야. 이번에는 이민성이 그라운드가 아니라 벤치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한일전의 운명을 가른 것은 제자 엄지성의 왼발이었다.

도쿄 대첩의 주인공 이민성 감독은 3일 일본과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명예회복에 성공했다./KFA

한국과 일본이 0-0으로 팽팽히 맞선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 후반 16분. 엄지성은 일본 골문 왼쪽에서 공을 잡았다. 수비가 달라붙는 순간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지체 없이 왼발을 휘둘렀다. 공은 일본 골문 상단을 갈랐다. 1-0. 그 한 골로 한국은 2014 인천, 2018 자카르타·팔렘방, 2022 항저우에 이어 2026 아이치·나고야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사상 최초의 4연속 금메달이라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썼다.

29년 전에는 이민성의 왼발이었다.

29년 뒤에는 엄지성의 왼발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이번 우승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민성 감독이 이번 대회를 앞두고 걸어온 길 때문이다. 이 감독에게 일본은 영광만 안겨준 상대가 아니었다. 지난 1월 U-23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한국은 일본에 0-1로 패했다. 결승 진출에 실패하면서 이 감독의 전술과 경기 운영을 둘러싼 비판도 거셌다.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도 의문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격 패턴이 단조롭다는 지적, 상대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다는 비판, 유럽파 선수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한국 공격의 에이스 엄지성이 일본과 2026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결승전 후반 16분 선제골을 터뜨린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나고야=뉴시스

단기 국제대회에서 감독의 운명은 결국 결과가 결정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아시안게임은 이민성에게 단순한 국제대회 하나가 아니었다.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 증명해야 하는 무대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지가 일본이었다. 축구가 때로 잔인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9년 전 자신에게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상대가 29년 뒤에는 지도자로서의 명예를 좌우하는 상대가 됐다.

그 결정적인 순간 이민성을 구한 선수가 엄지성이었다. 엄지성은 이번 대회에서 4골 4도움을 기록하며 한국 공격의 중심에 섰다. 조별리그부터 해결사 역할을 맡았고 중국과의 준결승에서는 두 골에 모두 관여하며 2-1 역전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본전에서는 자신이 직접 결승골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엄지성이 단순한 공격수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이 공격할 때는 자신의 진영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상대 측면 공격을 차단했다. 공을 빼앗으면 다시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뛰었다.

화려한 공격 능력과 궂은 수비를 동시에 수행했다. 그것이 에이스의 모습이다. 잘하는 선수가 에이스가 아니라, 팀이 가장 필요로 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내는 선수가 진짜 에이스다.

중국의 유망주 왕위둥이 준결승을 마친 뒤 엄지성에게서 기술과 드리블뿐 아니라 ‘상황 판단 능력’의 차이를 느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축구에서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가르는 것은 화려한 개인기가 아니다.

지난 1월 U-23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0-1 패배를 설욕한 한국 선수들이 환희를 만끽하는 동안 일본 선수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나고야=뉴시스

언제 돌파해야 하고, 언제 패스해야 하며, 언제 슛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다. 엄지성의 결승골이 바로 그랬다. 완벽한 공간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몸을 돌리는 순간 일본 수비수와 골키퍼가 대응하기 전에 슛을 날렸다.

'손자병법'에는 ‘병귀신속(兵貴神速)’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에서는 신속함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완벽한 준비보다 빠른 판단과 과감한 실행이 승부를 가른다.

29년 전 이민성도 그랬다. 수비수였던 그가 상대 진영까지 올라가 왼발 중거리슛을 날릴 것이라고 일본은 예상하지 못했다. 2026년의 엄지성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수비진이 진영을 완전히 갖추기도 전에 몸을 돌렸고 왼발을 휘둘렀다.

두 골 사이에는 29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그 본질은 닮아 있다. 망설이지 않은 사람이 역사를 만들었다. 이번 우승이 한국 축구에 던지는 의미도 작지 않다. 엄지성을 비롯해 배준호, 김지수, 이영준 등 해외 무대를 경험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이 국제대회의 압박을 견디며 정상에 올랐다.

특히 아시안게임 결승이라는 중압감, 그것도 개최국 일본을 상대로 한 '운명의 한일전'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경험은 앞으로 이들의 선수 생활에서 값진 자산이 될 것이다. 한국은 이번 대회까지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일본과 세 차례 연속 만나 모두 승리했다.

운명의 한일전에서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이민성 감독./나고야=뉴시스

그러나 이번 승리는 앞선 두 번과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국 축구가 4연패라는 역사를 완성한 경기이면서, 한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던 감독과 새로운 세대의 에이스가 함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민성 감독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됐다. 선수 시절에는 자신의 왼발로 문제를 해결했다. 감독이 된 뒤에는 자신이 선택한 선수의 왼발이 문제를 해결했다. 선수와 감독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수는 자신이 뛰어 승부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감독은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누군가를 선택하고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엄지성의 결승골은 이민성에게 더욱 특별했을 것이다.

29년 전 이민성은 자신의 한 방으로 일본을 무너뜨렸다.

29년 뒤 이민성은 제자의 한 방을 벤치에서 지켜봤다.

9월 30일 중국과 준결승에서 엄지성의 어시스트로 연속골을 터뜨려 2-1 역전승을 견인한 이영준(아래)과 배준호./KFA

그리고 그 순간 자신에게 따라붙던 전술 부재 논란과 아시안컵 일본전 패배의 상처도 상당 부분 털어냈다. 옛말에 ‘유종의 미(有終之美)’라고 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을 아름답게 맺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이 이민성 감독에게 마지막 무대라면 이보다 더 극적인 마무리도 찾기 어렵다. 일본을 상대로 시작된 그의 축구 인생 최고의 기억이, 다시 일본을 상대로 지도자로서 가장 값진 순간 가운데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7년 이민성의 왼발은 ‘도쿄대첩’을 만들었다. 2026년 엄지성의 왼발은 아시안게임 4연패를 완성했다. 한 사람은 선수로 역사를 만들었고, 또 한 사람은 그 감독의 제자가 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한가운데에는 일본이라는 숙적이 있었다. 축구에는 때때로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이 있다. 29년을 건너 이어진 두 번의 왼발. 이민성과 엄지성이 만들어낸 그 두 장면은 앞으로도 한국 축구의 한일전 역사에서 오래도록 함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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